서울 유명 사립대 사회과학계열 4학년 박모씨는 지난해 영어로 진행하는 전공 강의를 들을 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교수의 영어에 지방 사투리 억양이 잔뜩 녹아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의방식도 교수가 학생들을 자연스럽게 바라보며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미리 작성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읽는 형태였다.

같이 수업을 듣던 10여명의 외국인 교환학생들은 수업 도중 교수에게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며 7~8차례 질문을 던졌지만 교수는 무슨 뜻인지 모를 영어로 더듬더듬 대답을 했다.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박씨는 "비슷한 강의가 몇 달째 계속되자 외국인 학생들도 나중에는 포기한 듯 교과서만 들여다봤다"고 말했다.

2005년 무렵부터 국내 대학들이 전공 영어 강의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에서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들이 교수나 학생들의 영어 강의에 대한 준비와 역량이 아직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영어 강의를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 200개 4년제 대학이 대부분 영어 강의를 운영하고 있지만, 제대로 진행되는 영어 강의는 손에 꼽을 만하다고 교육계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무늬만 영어 강의

서울의 한 대학 공대에서는 지난해 '말로만 영어 강의'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담당 교수는 영어 강의로 개설해놓고 수업을 우리말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들은 학생들의 영어 전공 강의 수강을 독려하기 위해 해당 과목에 대해서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를 허용하고 있으므로 학생들 학점도 좋게 나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한 지방 국립대에서는 전공 강의에서 어렵게 영어 강의를 이어가던 한 교수가 "도저히 안 되겠다. 이제부터 우리말로 하자"며 한국말 강의로 전환한 일이 화제가 됐다. 교수가 한글로 강의를 시작하자 깊이 있는 지식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눈을 번쩍 뜨며 "우리 교수님이 저렇게 박식했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어+한국어 절충형 강의'도 생겼다. 서울의 한 사립대 사회과학대 4년인 최모씨가 지난해 받은 수업은 50분의 수업시간 가운데 40분은 교수가 영어로 강의한 뒤 10분은 한글로 요점 정리를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교수 본인의 영어 소통력과 학생들의 이해력 부족을 동시에 고려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같이 수업을 듣던 외국인 유학생들은 요점 정리시간에 먼 산만 바라보거나 미리 짐을 싸서 강의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대학들의 밀어붙이기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학생들 영어 이해력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연세대 인문계열 한 교수는 "수업시간에 의사 소통이 잘 안 돼 강의가 제대로 진행이 안 된다. 수업이 끝나고 찾아와 '아까 말씀하신 게 이런 뜻이에요?'라고 묻는 학생도 있고, 심지어 시험 날짜가 언제냐고 묻는 학생들도 있다"고 말했다.

대학 당국의 '영어 강의 밀어붙이기'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서울 한 대학 사학과의 교수는 프랑스에서 중국사를 전공해 프랑스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지만 학교 방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동양사를 강의하고 있다.

이 대학 인문계의 한 교수는 "중국 사료 같은 것들은 우리말로도 표현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영어 강의 원칙을 적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는 4년 전 한문학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라는 대학 본부 지침이 떨어지자 난리가 났었다. 결국 교수들이 고성을 지르면서 반대해 이 방침은 철회됐다.

대학들이 영어 전공 강의를 이같이 밀어붙이는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 불기 시작한 '국제화' 바람 때문이다. 외국인 교수와 학생 숫자가 늘어나면서 영어 강의를 늘려야 한다며 대학들이 '영어 강의 늘리기' 실적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세대·고려대 등 주요 대학들은 신규 교수 채용 때 일정 학점 이상을 의무적으로 영어로 강의한다는 약속을 받고 있다.

홍국선 서울대 공대 교수는 "영어 강의를 하면 과목에 따라서 지식의 50%밖에 전달할 수 없다"며 "할 수 있는 분야에만 영어 강의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주 연세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국제화시대에 영어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겠지만 영어 강의비율에 연연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글로벌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보완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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