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투데이

1981년 당선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이집트 대통령은 국민적 지지를 통해 헌법까지 바꾸며 장기독재자의 길을 유지해왔다. 그의 30년 철권통치는 왜 한순간에 무너졌을까.

많은 중동 전문가들은 폭로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무바라크 일가의 부패와 미국의 반(反) 무바라크 운동가 지원 내용 등이 담긴 미국의 외교전문을 공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3년 전부터 계속된 물가폭등과 높은 실업률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지(2월13일 자)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열두살 손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잡지에 따르면 이집트의 케네디가(家), 현대판 이집트 왕조를 세우려던 무바라크의 계획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건 손자인 무함마드(Mohamed·당시 12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2009년 봄부터였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함마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무바라크의 굳은 표정도 손자 무함마드 앞에서는 인자한 미소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검은 머리·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애교가 많았다던 무함마드는 무바라크에게 통치를 계속할 힘을 줬다. 무함마드는 대통령궁 공식 사진에 할아버지와 함께 자주 등장했으며 축구경기를 볼 때도 무바라크의 옆자리는 항상 무함마드의 차지였다.

2009년 5월, 할아버지 무바라크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부모(무바라크의 장남 알라·Alaa)의 집에 돌아간 무함마드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한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무바라크는 손자를 프랑스 파리의 병원으로 보냈지만 며칠 후 뇌출혈로 사망했다.

큰 충격을 받은 무바라크는 워싱턴에서 예정됐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까지 취소했다. 며칠 뒤인 6월 4일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해 “미국은 평화로운 선거로 구성된 정부를 지지하며 표현의 자유, 정직한 정부, 선택의 자유 등 민주적 가치를 옹호할 것”이라며 아랍권을 향한 역사적인 연설을 한 자리에도 무바라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집트 국민은 처음에는 손자를 잃은 대통령을 동정했다. 무바라크에 대한 동정은 지지로 바뀌기까지 했다. 한 이집트 국민은 “우리는 가족이며 무바라크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무바라크의 한 측근은 “당시 무바라크가 하야를 선언했다면 국민이 오히려 더 있어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물러나지 않았고 대신 손자를 잃은 충격에 정권 장악력을 잃어간다는 추측만이 난무했다. 몇 주 뒤 무바라크를 인터뷰한 이스라엘의 언론인 스마다르 페리(Smadar Peri)는 “그의 정신은 말짱했지만 눈에 광채(光彩)가 사라졌다”고 전했다.

손자의 죽음으로 무바라크는 국정에도, 대통령직에도, 자신의 미래에도 흥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돌파구(명예로운 퇴진)를 찾을 방향 감각까지 잃었다고 뉴스위크는 진단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려 했던 둘째 아들 가말(Gamal) 조차도 믿지 않았다. 무바라크가 정치 후계자로 내세운 가말은 사업가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지만 카리스마와 소통능력이 없었다.

그때부터 무바라크 정권의 실질적 보루였던 군부와 비밀경찰도 가말에게 등을 돌렸다. 무바라크의 보좌관들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랫동안 정보책임자였던 사프왓 샤리프(Safwat Sharif)였다.

한 이집트 소식통은 “무바라크 정권이 부패했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400억~700억 달러(한화 45조~78조원)의 무바라크가(家) 부정축재 자금이 조성됐다는 말도 있지만 한 소식통은 “근거가 빈약한 이야기이며 무바라크는 다른 독재자들에 비교한다면 깨끗한 편”이라 일축했다고 한다. 무바라크의 철옹성은 부정부패도, 경제난도 아닌 한 소년의 죽음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