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명(抗命)장군'은 지금도 진압명령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부끄럽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으로 중국 군인의 양심을 대표할 만하다."

홍콩 빈과일보는 15일자 사설을 통해 중국의 한 예비역 소장(少將)을 이렇게 치켜세웠다.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건 당시 시위대 강제 진압 명령을 거부했던 제38군장(육군 소장) 쉬친셴(徐勤先·75)이 그 주인공이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인민해방군 38군장(육군소장)으로 상부의 시위대 진압 명령을 거부해 5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항명장군’ 쉬친셴(75·왼쪽)과 쉬씨의 항명사건을 세상에 알린 중국의 언론인 양지성(71·오른쪽)씨의 모습.

신화통신 기자 출신 작가 양지성(楊繼繩·71)이 최근 발간한 '중국개혁연대의 정치투쟁'이라는 책에 따르면, 1989년 5월 17일 중국 베이징군구(軍區)의 대책회의장에서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에 대한 강제진압 명령이 하달됐다. 리라이주(李來柱) 부사령관은 "인민해방군 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이니 장성 여러분은 지금 당장 분명한 태도를 표시하라"고 했다. 장군들이 침묵하며 눈치를 보는 사이 쉬친셴 38군장이 일어서서 "나는 그런 구두(口頭) 명령에는 따를 수 없다. 서면으로 명령하라"고 말했다.

다른 장군들은 놀라 쉬친셴을 바라봤다. 리라이주 부사령관은 "오늘은 서면 명령서가 없으니 다음에 주겠다. 전쟁 시기에는 이런 일도 하는 법이다"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쉬 장군은 "지금은 분명히 전쟁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구두 명령을 집행할 수 없고 진압 작전에 참여할 수도 없다"고 말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1950년 6·25전쟁에도 참전했던 쉬 장군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 무렵 "차라리 죽음을 당할지언정 역사의 죄인은 되지 않겠다"면서 톈안먼 사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쉬 장군의 언행은 곧바로 베이징군구 저우이빙(周依�H) 사령원을 통해 양상쿤(楊尙昆) 당시 국가주석에게 보고됐다. 양 주석은 "군령을 어긴 것은 군법에 따라 처리해야 할 중대 문제"라며 당시의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중앙군사위 주석에게 직보했다. 덩샤오핑은 "군인은 어느 누구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즉각 조치를 명령했다.

대책회의장을 나온 쉬 장군은 신장결석 치료차 베이징군구 총의원(總醫院)에 입원했다가 병원에서 체포돼 끌려나갔다. 그 후 군사법정에서 항명죄로 징역 5년형을 받고 공산당 당적도 박탈당했다. 처음 4년은 중국에서 가장 악명 높다는 베이징 인근의 친청(秦城)감옥에서 복역했고, 마지막 1년은 경찰 병원에서 복역했다. 지금은 허베이(河北)성 스자좡(石家莊)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다고 빈과일보가 전했다.

톈안먼 사건 당시 학생들 편에 섰다가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서기의 보좌관 출신인 우궈광(吳國光) 교수(캐나다 빅토리아대)는 "중국 인민해방군에도 강제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이 있다는 소문은 간간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전말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당시 쉬 장군은 진압 작전 참가를 거부했지만 중앙군사위원회는 그가 속했던 38군을 포함해 39군, 54군, 15공군부대 등 25만명을 동원해 6월 4일 시위대를 강제해산해 수많은 희생을 불렀다. 쉬 장군은 이 일을 거론하며 "비록 역사의 공신은 못됐지만, 역사의 죄인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