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차 홈쇼핑 전화상담원인 서모(40)씨는 지난주 폭설로 화가 난 고객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서씨가 20분 넘게 배송이 늦어지는 상황을 설명했지만, 일부 고객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기어서라도 물건을 갖고 오라"며 막무가내로 화를 냈다. 서씨는 "반말뿐 아니라 폭언, 성희롱성 발언까지 묵묵히 참아야 하다 보니 이 업계에서는 3년만 일해도 '베테랑' 소리 듣는다"며 "이러다 보니 나도 쌓인 스트레스를 외부에서 풀려고 괜히 식당 종업원들에게 소리지르며 서비스 탓을 하곤 한다"고 했다.

전남 여수의 한 은행에서 근무하는 한모(28)씨는 3년 전 겪은 일이 생각날 때면 지금도 손이 떨린다. 한 중년 남성이 한씨에게 "10만원권 수표를 발행해달라"고 요청했고, 한씨는 "1장당 50원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년 남성은 "내가 명색이 대학교수인데 수수료까지 내야 하느냐"며 '버럭' 화를 냈지만, 한씨는 차분히 "VIP 고객이 아니면 수수료를 내셔야 한다"고 규정을 알렸다. 그러자 이 남성은 "내가 교수인데 VIP 대접도 못 받느냐"며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모두 꺼내 한씨 이마에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손님을 '왕'처럼 대하라는 조직 분위기 탓에 동료 직원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버럭 신양(박신양)' '호통 명수(박명수)' 같은 캐릭터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지만, 이렇게 화부터 내는 손님을 맞아야 하는 서비스 업종 종사자, 이른바 '감정 노동자'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웃는 얼굴로 분노를 참아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지만,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들은 개인 문제로 치부하며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회사측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친절하게 고객을 대하라"고 요구하며 '미스터리 쇼퍼(암행 점검요원)'까지 동원해 직원들 친절 여부를 감시하고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인들은 성질이 워낙 급해 불만족스러우면 화부터 내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감정 노동자들이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이런 스트레스는 감정 노동자들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3년째 근무 중인 최모(27)씨는 사람이 많은 명동이나 강남 일대 번화가는 피한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다 지친 탓이다. 최씨는 "면세품 판매 때 '아가씨, 이리 와봐. 이거 얼마야'라는 반말을 하는 분들이 많아 괴롭지만, 스튜어디스는 늘 웃는 얼굴로 승객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했다.

서은규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감정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이면 사회적 갈등 요인이 커지고 정신 관련 질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어, 회사 자체적으로 상담 프로그램 등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 감정 노동자

은행원·승무원·전화상담원 같이 직접 고객을 대해야 하는 직업 종사자들로, 조직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나타내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앨리 러셀 혹실드 캘리포니아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가 1983년 '감정 노동(The Managed Heart)'이라는 책에서 처음 거론한 개념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폭넓은 의미에서 서비스·판매 종사자들은 감정 노동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며 "작년 말 기준으로 530만명 정도가 해당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