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老兵) 이진삼<사진> 의원은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을 찾은 기자에게 손사래부터 쳤다. "군인에게 정보보안은 생명이니 육군본부에 가서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참모총장 오른 엘리트 장교도 목숨 걸고 적진 침투한 사실을 장병들이 안다면 사기가 오르지 않겠냐'는 거듭된 요청에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는 "연평도 사건 때 내가 비행단장이었다면 위에서 뭐라 하든 미사일로 북한 해안포진지를 때렸을 것"이라고 했다.

―1967년 작전 당시 가족 걱정은 하지 않았나?

"군인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자기의 생명을 요구받는 순간이다. 작전하다 죽는다면 영광스러운 일 아닌가."

―작전 끝나고 보름 뒤에 막내가 태어났던데.

"가족에게 작전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당시 자는 아이들 보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내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찡하더라."

―작전 직후인 1968년에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김신조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 작전으로 잠시 주춤하더니 또다시 도발하더라. 북한은 무력도발을 정권 유지 차원에서 써먹고 있다. 여기에 끌려다니면 이용만 당하고 우리 피해만 커질 뿐이다. 몇십배 몇백배 응징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해줘야 도발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체구(166㎝)가 작은데 싸움을 잘했나.

"(웃음) 태권도 7단이다. 부여고 다닐 때 수원농고 학생들이 수학여행 와선 우리 학교 학생들을 패는 게 아니냐. 학교 규율부장 하던 내가 막 떠나려던 수학여행 버스에 올라 열댓 명 두들겨 팼다. 그 일로 학교에서 쫓겨났지만."

―육사에 간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6·25 전쟁 당시 부여가 적군 치하에 있을 때 북한을 비방하는 삐라가 뿌려지는 사건이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다른 선배들이 한 일이다. 난 당시만 해도 '애국'이라는 개념을 잘 모를 때였다. 아무튼 내가 주모자로 몰려 온 가족이 내무서에 끌려다니며 고생했다. 이후 북한 단어만 들으면 부르르 떨린다."

―참모총장을 꿈꾸었나.

"1955년 육사 15기로 입교할 때 235명 중에 177등 했고 졸업할 때 120등 했다. 중령까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총장이 됐다. 이력 봐라. 수색대, 방첩대, 특공대, 몸 안 사리고 뛰다 보니 높이 평가해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