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은 수색ㆍ특공ㆍ방첩대 경력을 가진 전형적인 야전 군인이었다. 방첩부대 609특공대장 시절 전국을 누비며 무장공비와 간첩을 잡으러 다니던 이진삼 대위.

이진삼(75) 자유선진당 의원이 방첩부대(현 기무사령부) 대위로 근무하던 1960년대 후반 세 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북한군 33명을 사살한 사실이 최근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과 기무사령부가 보관하고 있던 이른바 '응징보복작전' 자료와 이 의원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자료들은 수년 전 기밀문서 보존 연한이 지나면서 일부 국회 국방위원들에게 제공됐다.

1967년 봄부터 강원과 충청 등 대한민국 곳곳에서 무장공비들이 준동했다. 그해 3월 조선노동당 제4기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는 데 총역량을 집중, 무장공비를 전후방으로 침투시켜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전군에 하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로 인해 공비 도발이 1966년 57건에서 1967년 118회로 배 이상 늘어났고, 휴전선 인근 아군과 미군의 GP(경계초소)가 수시로 공비의 습격을 받았다.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21사단 부연대장이 살해당하는 등 공비들은 국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중동부 전선에선 공비 무리가 3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태백산맥을 타고 유유히 북한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해 9월 초 어느 날 군내 최고 실세로 알려진 방첩부대장 윤필용 준장은 서종철 1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방첩대 산하 '609특공대장' 이진삼(당시 31세) 대위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이 대위는 통화 직후 큰 목소리로 보고했다. "대원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가겠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 하지만 윤 준장은 "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고 말렸고, 이 대위는 "그래도 응징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부대장실을 나섰다.

그날 밤 서울 홍릉 근처 609특공대 본부로 돌아온 이 대위는 곧바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609특공대는 방첩부대장의 직할부대로 '방첩대의 방첩대'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부대원은 30명이었고 특공대장에겐 육군 전 부대에서 대원을 우선 선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 공수부대에서 주로 대원들을 충원했다. 수색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이 대위는 '월남파병 기동대장'으로 복무한 베트남에서 돌아온 직후 소령이 맡아오던 609특공대장에 임명됐다. 그런 이 대위를 윤 준장은 각별히 아꼈다.

이 대위는 '응징보복작전'에 투입할 대원들을 고르다 마침내 북한 지리와 말에 익숙하고 고난도 훈련이 몸에 밴 북한 무장공비 출신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해 4월부터 7월까지 생포된 공비 가운데 전향의사를 밝힌 15명 중 면밀한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6명을 추려냈다. 20대 초중반으로 강원도 정선이나 충북 괴산 등에서 잡힌 공비들이었다. 이 대위는 '남한 전사'로 신분이 바뀐 이들에게 단검 투척 등 특수훈련을 시켰다. 자신의 집에 데려가 밥을 먹이는 등 따뜻하게 대해줬고 훈련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대위는 그러나 이 모든 작전준비 과정을 비밀에 부쳤다. 윤필용 준장에게도 '사후' 보고했다. 당시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려면 아군 부대의 협조가 필요하지만 '609특공대장'의 요청은 윤 준장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첫 북파 작전엔 이 대위와 3명의 요원이 참가하기로 했다.

디데이(D-day)는 9월 27일 일몰 직후였다. 일명 금성천 작전. 어둠이 짙게 깔리자 최전선 육군 모 사단 작전지역에 이 대위 등 북한군 복장을 한 4명의 요원이 나타났다. 각자 북한제 기관총, 수류탄, 탄창 4개(탄알 200발)로 무장했고 엿과 고추장, 소금 등 비상식량을 챙긴 상태였다. 이들은 황해도 개풍군 금성천을 따라 북한 지역 내 4㎞까지 잠입했다. 일부러 지뢰 매설이 어려운 계곡 루트를 택했으나 1㎞를 전진하는 데 2시간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이들은 다음날 오후 4시쯤 정찰 도중 지뢰 매설 작업을 나온 북한군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군관과 부군관을 조준 사격으로 쓰러뜨리자, 북한군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류탄 6발도 투척했다. 이 첫 교전에서 적군 13명을 사살했다. 작전기간 2박3일 동안 아군은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무사귀환. 이 대위는 첫 작전을 통해 공비 출신 요원들을 더 신뢰하게 되었고 다음 작전에선 북한군 사단장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 작전은 10월 14일이었다. 전체 요원 6명 중 3명을 재선발했고 인솔자는 이번에도 이 대위였다. 당초 육군 모 사단에 인접한 북한군 GP를 습격하고 사단장의 동선(動線)을 확인해 사살하려 했으나, 매복 중이던 적군과 조우하면서 주변 지역에 대한 정찰에 만족하고 귀대했다.

이들은 나흘 만인 10월 18일 밤 세 번째 작전에 나섰다. 첫 번째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운 대원을 보강하는 등 다시 4명으로 팀을 짰다. 하지만 두 차례의 침투로 북한군의 경계는 대폭 강화돼 있었다. 이 대위는 육로 대신 수로를 택했다. 임진강을 헤엄쳐 건넜고 낮은 포복으로 휴전선 너머 북한군 GP(경계초소)에 바짝 접근했다. 조용히 숨죽이며 공격 기회를 노렸다. 경계가 소홀해진 새벽 GP를 덮쳤고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 8발을 투척했다. 북한군 20명이 사살됐다. 그러나 작전 직후 모이기로 했던 집결지에 요원 한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치열했던 GP 교전 과정에서 희생됐다. 남은 3명은 더 이상 적지에서 머물지 못하고 부대로 귀환해야 했다.

다음 작전을 준비하던 이 대위는 그러나 더 이상 북한 지역에 침투할 수 없었다. 뒤늦게 전과(戰果)를 보고받은 윤 준장과 육사 선배였던 전두환·노태우·권익현 중령 등이 "더 이상은 안 된다. 진짜 죽는다"고 이 대위를 제지했다. 방첩대 대공처장인 김교련 대령은 일선 전방부대에 '609특공대'가 오면 북한에 못 들어가게 하라고 지시했다.

육본 군사연구실에 보관됐던 자료에는 "'응징보복작전'으로 북괴 무장공비의 도발이 주춤해졌다"는 내용과 함께 당시 이 대위에 대한 신상 파일이 들어 있었다. "대위 31세 이진삼, (死生觀·사생관): 내 짧은 인생, 숨쉬는 그날까지 영원한 조국을 위해 바칠 것은 오직 목숨뿐! (軍人觀·군인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군인은 죽을 자격도 없다. 첫째도 임무! 둘째도 임무! 셋째도 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