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를 대고 자른 듯한 새카만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개그우먼 김영희(28)가 나타났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두 분 토론'에서 "여자들은 소나 키워야 한다"는 '남(자는)하(늘이다)당' 대표를 향해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라며 시원하게 되받아치던 '여(자가)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당' 대표가 아니었다. 1970년대 양품점에서 팔았던 것 같은 TV 속 보라색 재킷을 벗고, 나풀대는 천을 겹겹이 덧대 풍성한 레이스 치마와 회색 카디건을 걸쳤다.
"한 번도 제가 못 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선배들은 '넌 얼굴로 뽑혔다'고 해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나요." 최근에는 '봉숭아학당'에서 여성 돌싱(돌아온 싱글)들의 모임 '비너스'의 주책 맞은 40대 회장을 코믹하게 그려 인기몰이 중이다. '아줌마 개그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대구 출신인 그는 영남이공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코미디극단 오디션에서 단번에 합격했다. 소극장 활동도 3개월밖에 안 했다. 상경 1년 만인 2008년 OBS 개그맨 공채시험에 합격하고, 2009년 MBC, 2010년 KBS 개그맨 시험에도 연속 합격했다. 데뷔 7개월 만에 KBS 연예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개그계의 엄친딸'이란 별명도 얻었다. "뒤숭숭하고 신기해요. 꿈만 같죠. 시켜주시니까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빨리 사랑받을 줄은 몰랐어요."
"쉽게 거둔 성공은 아니었다"고 했다. OBS에 합격했지만 정작 개그 프로그램이 없어 출연할 수 없었고, MBC에서는 몇몇 동기들만 방송에 나갔다. 그는 '무명 현역'인 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까지 2009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결국 KBS 공채시험을 준비하려고 MBC를 그만뒀는데 KBS 시험이 미뤄졌다. '괜히 나왔나'하는 후회가 들었다. "3개월을 집에만 있었어요. '이 시간에 MBC 동기들은 출근할 텐데 나는 뭐 하는 걸까' 해서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의 개그 아이디어 근원은 어머니다. 어머니의 전화 통화나 말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대본을 다 짜면 어머니께 먼저 검사를 받아요. 워낙 입담이 좋고 재주꾼이셔서 큰 도움이 되죠."
요즘 '두 분 토론'에 함께 나오는 박영진보다 감각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비판 때문에 두렵다고도 했다. "'소는 누가 키워', '남자의 …를 매도하지마', '가관이야' 하고 박영진 선배가 치고 나가면 제가 그 이상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어요. 한동안 현장 반응이 나빠 편집도 많이 됐고요." 소극장 경력이 짧은 것이 자신의 단점 중 하나라고 했다. "소극장에서 5~6년 활동한 동기들은 훨씬 능청스러워요. '조금 더 일찍 개그를 시작했더라면' '소극장에서 좀 더 갈고 닦았더라면'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김영희는 "일본 개그맨들은 코미디뿐만 아니라 사업도 하고 드라마 주인공도 하더라"며 "대학 때 영화를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 눈물 쏙 빼는 멜로영화를 연출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한참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얘기하던 그가 들고 있던 대본을 보더니 말했다. "지난주에 너무 죽을 쒀서 이번 주엔 잘해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꿈과 걱정이 마구 뒤섞인 데서 추출해낸 진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