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청하는 반정부 시위 발생 3주째에 접어든 9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광장에만 약 25만명(AP 추산)이 모이는 등 시위가 다시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뉴욕타임스는 "2주 만에 가장 많은 인파"라고 전했고, BBC는 "시위가 시작된 지난달 25일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보도했다.

◆시위, 소도시로 번지며 확산 중

시위가 8일부터 그동안 잠잠했던 소도시들로 번지면서 이집트 남서부 뉴밸리에선 8·9일 이틀간 시위대 수천 명과 경찰이 충돌, 3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이날 시위는 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이 동참하며 더욱 확산됐다. 수에즈 운하 운영을 담당하는 '수에즈 운하 관리국' 산하 5개 기업 노동자들은 8일 오후부터 연좌(連坐)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에는 아직 영향이 없다고 뉴욕타임스는 9일 보도했다. 수에즈시에선 섬유 노동자 2000여명이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고, 나일강변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룩소르에선 관광 산업 마비에 항의하는 관련 업계 노동자 수천 명이 반정부 행진을 벌였다. 카이로의 알아람 건물 로비에는 기자들 100여명이 모여 언론의 자유 보장과 숨진 기자 2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시위대의 규모가 급속히 불어난 것은 8일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의 대국민 연설이 시위대에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술레이만은 이날 오후 국영TV 연설을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개헌위원회 구성을 추인했다. 앞으로 질서있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 분명한 로드맵(계획)과 일정을 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정부가 '시간 끌기' 꼼수를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보안당국에 체포됐다가 7일 풀려나 시위군중들 사이에 영웅으로 부상한 구글 임원 와엘 고님(Ghonim·30)이 타흐리르광장에 등장한 것도 시위동력을 되살린 불씨로 작용했다. 유튜브(동영상 공유 사이트) 등 인터넷에선 지난달 28일 진압경찰이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장면을 담은 각종 동영상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이집트인들의 분노를 고조시켰다.

◆술레이만, "시위 장기화, 더는 못 견딘다"

시위대는 이날 처음으로 타흐리르광장을 벗어나 의회 해산을 요구하며 의회 건물을 향해 행진했다. 시위 지도그룹은 오는 11일을 '무바라크 심판일'로 정하고,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날 시위 지도부는 전문직 노조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교수와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수천 명과 중산층이 시위에 합류했다.

이에 맞서 술레이만 부통령은 이날 국내 언론사 대표들과 만나 "경찰력을 동원해 문제를 풀길 원치 않지만, 시위사태의 장기화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고 국영통신 메나(MENA)가 9일 보도했다. 그는 또 "정권이 뒤집히거나 무바라크 대통령이 당장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대화로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남은 선택은 거대한 혼란과 쿠데타뿐"이라고 경고했다.

◆美 "긴급조치 해제하라"… 이집트 주변국 "美, 혼란 가중시키지 마라"

미국은 8일 이집트 정부에 '긴급조치법(emergency law) 즉시 해제' 등 4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술레이만 이집트 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사항을 전했다.

백악관에 따르면 미국의 요구는 ▲언론인과 시민운동가에 대한 구타·폭력·체포 즉각 금지 및 집회와 표현의 자유 보장 ▲긴급조치법 즉각 철회 ▲다양한 야권 인사들과 대화 ▲정권이양의 로드맵과 일정 개발에 다양한 야권 인사 참여 등이다.

한편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이집트의 이웃국가들은 미국에 지속적으로 "시위대에 너무 힘을 실어줘 지역 혼란을 가중시키거나 무바라크 대통령을 너무 쉽게 내치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