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에 사는 고3 학생 유시(Jussi ·18)군은 핀란드에서 '자격시험(ylioppilastutkinto)'으로 불리는 대입 수능시험 시작(2월 11일)을 닷새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 수능 시험을 앞둔 고3은 밤을 새워 공부하지만, 유시군은 쫓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잠도 평소처럼 7시간 정도 잔다고 했다.

한국 수험생들과 달리 핀란드 수험생들이 여유 있는 것은 '복수(複數) 수능제' 덕분이다. '교육 강국' 핀란드에선 대부분 수험생이 수능시험을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2학기까지 세 번에 걸쳐 치르고, 이 중 과목별로 가장 좋은 성적만 골라 대학에 제출한다. 유시군은 "이번 수능에선 핀란드어와 영어 시험에만 주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복수 수능제'는 우리도 도입을 추진했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2014학년도 수능부터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연 2회 수능'을 치르겠다"고 발표했지만, 준비 부족·교사 반대 등의 이유로 무기 연기했다. 한국은 사실상 포기한 '복수 수능제'가 교육 강국 핀란드에선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은 어떤 차이 때문일까.

세 번의 기회…실수해도 만회할 수 있어

핀란드 수험생들이 치르는 수능과목은 7~8과목이지만 학생들 부담은 그리 크지 않다. 하루에 한 과목씩 6시간에 걸쳐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시간이 모자라 문제를 못 푸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올해 '1차 수능' 첫날(2월 11일)에는 모국어(핀란드어 또는 스웨덴어) 시험을 보고, 14일부터 사흘간 모국어·영어·제2외국어 듣기평가 시험을 차례로 본다. 영어·수학·사회·과학 등 나머지 시험은 3월에 2~3일마다 한 과목씩 진행된다. 〈

반면 한국 수험생이 치르는 수능은 '체력전' 성격을 띤다. 매년 11월 수능일에 전 과목(문과 최대 7과목, 이과 최대 6과목)을 9시간에 걸쳐 보기 때문에 당일 컨디션에 따라 성적이 좌우되기도 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수능 시험을 망치면 인생행로가 바뀌는 일도 우리 수험생들에게는 다반사로 생긴다.

양국의 수험생들이 치르는 수능 문제유형도 완전히 다르다. 우리 수능은 수리(수학) 9문제 단답형을 제외하곤 모두 객관식이지만, 핀란드 수능은 서술형·주관식 문제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핀란드 수능 영어과목의 경우 가장 배점(299점 중 99점)이 높은 문제는 작문이다. 5가지 문제 중 하나를 골라 150~250개 영어단어로 글을 쓰도록 한다. 지난해 가을 수능시험에서는 "오지(奧地) 여행은 즐겁지만 위험한데 이에 대한 의견을 여행잡지 기사로 작성하라" 등의 문제가 출제됐다.

나머지 200점은 듣기평가(90점)와 독해시험(110점)이다. 독해 문제 중에는 '타임'이나 '이코노미스트' 등 영·미 언론에 실린 기사를 요약하는 문제도 출제된다. 반면 우리 수능의 외국어영역(영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독해(60%)이며, 모두 객관식 문제다.

수학·과학 과목에서도 핀란드 수능시험은 해답뿐 아니라 문제 풀이과정도 적어내야 한다. 반면 우리 수능 수리영역에서는 단 9개의 문제가 주관식으로 출제되고, 그마저도 풀이과정을 보지 않는 단답형이다.

핀란드 카사부오렌중학교 2학년생들이 사회 시험을 앞두고 준비를 하고 있다. 핀란드의 한 교민은“중학생 아들이 수학 시험 답을 다 맞혔는데도 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이었다”며“교사는‘외워서 풀면 점수를 줄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수능 1~2점보다 '전공 관심'이 중요

핀란드의 학생·학부모는 수능 1~2점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소수점 단위까지 성적표에 기재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수준만 기재되는 이른바 '등급제 수능'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L등급은 상위 5% 학생에게 주어지고, 하위 5%(I등급)가 최하등급이다. 총 7등급이 주어진다.

성적표에 기재된 등급은 대개 점수로 환산돼 대학입학 전형에 반영된다. 이 환산점수에 각 대학 모집단위별로 치르는 일종의 '본고사'인 학과별 입학시험 점수를 더해서 합격자를 결정한다.

헬싱키의 한 고교 교사는 "수능등급이 반영되지만 학과별 본고사와 면접이 더 중요하다"며 "전공에 대한 관심이 없이는 수능성적이 높아도 원하는 대학·학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