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어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이 카페에서 노래해야 한다고 해도 좋아요.수십만 명이 모인 월드컵 응원무대도 좋고요. 카네기홀이라고 다를 건 없어요."

2월 3일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무대에 오르는 가수 이선희(47)는 "주변에서 '이젠 그런 무대에 서야 한다'고 권유해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속사는 '꿈의 무대', '기념비적 공연'이라며 열을 올리는데, 정작 무대에 오를 사람은 담담해 보였다. 이선희는 카네기홀 3개 극장 중 2804석 규모의 메인홀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에 선다. 이 무대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인으로 조용필, 인순이에 이어 세 번째다.

이선희는 몇 년 전부터 모든 노래를 작곡하고 기초 편곡까지 해서 편곡자에게 넘겨준다. 그는“아예 모를 때는 편했는데, 편곡을 좀 알게 되니까 더 욕심이 난다”며“아직 음악에 호기심이 많다”고 했다.

지난 21일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그 무대에 선 사람이 별로 없어서 음향에 대해 물어볼 데가 없다"며 "카네기홀에 직접 물으니 '울림이 좋으니까 전자악기 볼륨을 줄이라'는 대답만 왔다"고 했다.

"우리 세대에겐 카네기홀에 서는 게 꿈이었죠. 요즘 세대는 카네기홀을 잘 모르지 않나요? 그래도 저는 제 꿈을 하나씩 이뤄가는 것 같아요." 그가 무덤덤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27년째 들려주고 있는 노래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을 뿐이다.

그의 말처럼 요즘 세대는 TV 공개홀은 알아도 카네기홀은 모른다. 그러나 올해 120주년을 맞는 카네기홀은 여전히 세계 최고 권위의 공연장 중 하나다. 무대에서 바라보는 5층 발코니의 위용은 누구든 잊지 못할 각인으로 남는다. 카네기홀은 최근 들어 대중음악에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으나 까다로운 대관 심사는 여전하다.

"미국 공연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종종 제의가 있었지만 반주 CD에 노래해 달라는 것이었죠. 그건 할 수 없었어요." 이선희는 함께 작업해온 5인조 밴드와 코러스 2명, 현악파트 12명과 함께 이번 무대에 선다.

그의 미국 공연은 10여년 전 라스베이거스가 마지막이었다. 공연은 만족스러웠지만 그때 그는 "앞으로 이곳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제 공연 관객 대부분이 교포들이잖아요. 그분들이 공연 보러 거기 왔다가 다들 카지노로 가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제가 뭔가 잘못 한 것 같고…. 하여튼 그곳에선 다시 하지 않을 거예요."

이선희는 직접 공연 콘티를 짜고 있다. 작가가 써준다는 걸 마다했다. "미국 전역에서 저를 보러 오시니까 할 말도 미리 생각하고 곡도 골라야 할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제가 어떤 노래를 했을 때 그때는 정말 풋풋했었는데 지금은 자식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고 있다든가….(웃음)" 그녀의 딸(고 2)은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 중이다.

몇 년 전부터 이선희는 인디밴드에 관심을 가져 왔다. 요즘도 홍대 앞 클럽에 가끔 간다. 자신이 그런 밴드의 음반을 제작할 수도, 함께 작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검증된 밴드와 함께 작업하는 건 어떠냐"고 물으니 "아, 좋아요 좋아"하고 반색했다. 음악 이야기를 할 때 그녀의 표정을 보면 데뷔 직후 방송사 악단장에게 "박자가 빨라진다"고 지적했다가 미움 사서 6개월 출연 정지를 받았던 맹랑소녀(孟浪少女)의 얼굴이 겹쳐진다.

"나이 들어간다고는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고, 잘 영글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선택,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잘했다, 이선희'하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카네기홀엔 오래된 농담이 있다. 맨해튼 거리에서 누군가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에게 "카네기홀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하고 물었다. 하이페츠가 답했다. "연습하세요." 조용필(1968년 데뷔), 인순이(1978년 데뷔)에 이어 1984년부터 연습해온 이선희가 드디어 카네기홀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