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할아버지가 무대에 올라 오카리나로 '에델바이스'와 크리스마스 캐럴 '울면 안 돼'를 연주했다. 64세 할머니가 인기그룹 DJ DOC의 히트곡 '나 이런 사람이야' 반주에 맞춰 온몸을 흔들었다. 300석짜리 강당 객석이 공연하는 노인들과 가족들이 뿜는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노인종합복지관 강당에서 열린 '2010년 송년 열린축제한마당' 행사 중 한 장면이다.

이 행사는 복지관에 다니는 노인 5000여명 중 예체능 기량을 닦은 270여명이 28개 팀으로 나눠 평소 갈고닦은 기량을 뽐낸 학예회였다.

오카리나 연주를 마치고 내려온 안정욱(87) 할아버지는 "7년 전 집사람을 앞세운 뒤 온종일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앞으로도 10년은 더 살테니 즐겁고 보람 있게 살자'고 생각했다"고 했다. 안 할아버지는 매주 화요일 복지관에서 영어와 오카리나를 배웠고, 요즘은 동아리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근처 요양원을 찾아 위문공연을 한다.

에어로빅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김명희(64)씨는 은색 별 수십 개가 찍힌 붉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살림하고 자식 키우느라 정신없던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노인종합복지관 강당에서 지난달 23일 열린 ‘송년 열린축제한마당’에서 노인들이 반 년 이상 배운 하와이 훌라댄스를 추고 있다.

복지관 직원은 "오카리나와 에어로빅 외에도 스포츠댄스·마술·여행영어 등 98개 강좌를 운영하고 있는데 워낙 수요가 많아 한 사람이 3개 강좌 이상 수강신청할 수 없게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60세에 은퇴해 80세에 사망할 경우, 매일 8시간 자고 3시간 밥 먹고 2시간 볼일 보면 하루 11시간씩 총 8만 시간의 자유시간이 생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8만 시간의 자유'는 남달리 건강을 타고난 사람들이나 누리던 축복이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물질적 풍요와 의학의 발달이 한국인의 수명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리면서, 평범한 사람도 절반 가까운 확률로 100세에 근접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8만 시간의 자유'를 넘어 '16만 시간의 자유'가 공백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한 황안나(71) 할머니는 "우리 세대는 일하고 자식 키우느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이 많다"면서 "아무런 할 일이 없으면 긴 노년이 괴로울 거라는 생각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나섰고, 덕분에 60대 이후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했다. 황 할머니가 찾은 해답은 '여행'이었다.

황 할머니는 퇴직한 뒤 400만원짜리 렌즈교환형(DSLR)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다. 카메라와 옷가지까지 소형 김치독 크기만한 등짐을 지고 110일에 걸쳐 통일전망대에서 서해안까지 걸어서 국토를 횡단했다. 800㎞에 걸친 국토 도보 종단여행도 했다. 지리산·소백산·덕유산을 각각 10번씩 올랐다. 건강도 뒷받침됐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 할머니가 여행 중 서울 집에 전화하면 남편과 두 아들이 "대단하다"고 박수를 쳤다. 여행이 끝나면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다. 황 할머니의 블로그엔 하루 평균 5000명이 들어온다. 책도 두 권이나 쓰고, 라디오 방송 출연도 수없이 했다. 황 할머니는 "나는 아들·며느리·손주들이 놀러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다"면서 "취미 생활 열심히 하며 바쁘게 살아야 자식들 걱정 안 시키고 행복하게 장수한다"고 했다.

그러나 황 할머니 같은 사람들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8년 8월~2009년 1월 60세 이상 노인 1만5000여명을 대상으로 '노인실태 조사'를 한 결과, 60세 이상 인구 다섯 명 중 세 명(55.7%)이 "여가 및 사회활동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나이가 많을수록, 소득·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함께 사는 가족이 적을수록 만족도가 떨어졌다.

응답자들이 '최근 1년간 가장 즐거웠던 여가활동'으로 꼽은 것도 가족과 보낸 시간(52.3%), 친지와 회식(18.5%), TV 시청·독서·책 읽기 등(10.5%)이었다. 어쩌다 가족·친지와 어울리는 경우를 빼면, 대부분 혼자서 돈 안 쓰고 할 수 있는 단조롭고 소극적인 소일거리에 그쳤다는 얘기다.

영남대 이재모 교수(지역·복지행정학)는 "한마디로 '100세 시대'를 채워 갈 콘텐츠가 없다는 뜻"이라면서 "건강과 돈 못지않게 노년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역할'인 만큼 노인들이 활동적인 여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가 전체에 득이 된다"고 했다.

서울대 최성재 교수(사회복지학)는 "우리 사회는 '노인들의 여가는 각자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결할 일이고, 사회는 경로당 만들고 복지관 세워주면 끝'이라는 인식에 머물고 있다"면서 "노인들의 심리와 신체적인 특징을 반영한 스포츠·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경험한 이웃 일본은 1982년에 이미 정부 차원에서 노인스포츠 개발 사업에 들어갔다. 정부가 노인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적극적으로 개발한 결과, 2000년에 이미 60세 이상 노인의 59.0%, 70세 이상 노인의 51.6%가 매주 1회 이상 옥외 체육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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