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시티의 유흥주점에서 일하는 캐서린(22)은 갓 돌 지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애 아빠는 '찰스'라는 한국인. 캐서린은 "2년 전 백화점에서 일할 때 어학연수생으로 마닐라에 온 찰스를 만나 4개월 동거했고,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임신 사실을 전하자 찰스는 "아이 아버지가 나인지 어떻게 아느냐"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캐서린이 아는 건 본명인지 별명인지 모를 '찰스'라는 이름과 받지 않는 그의 휴대전화 번호뿐. 졸지에 '싱글맘'이 된 캐서린은 늘어난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지난 여름부터 한국식 유흥주점인 'K-TV'에서 일하고 있다.

'오빠' '안녕' '사랑해' 등 기초 수준의 한국말을 구사하는 나이스(23·카페 직원). 그는 한국말로 "한국 남자 중엔 '쓰레기'가 많아요"라고 했다. 나이스도 두살 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류 가수 레인(비)과 닮은 동갑내기 한국인 '킴'과 사귀다 임신을 했다고 했다. 나이스는 "어차피 결혼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아이 가졌다는 말에 도망치듯 한국으로 가버린 킴이 정말 나쁘다"고 했다.

코피노(Kopino)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코리안(Korean)과 필리피노(Filipino)의 합성어로 어학연수나 관광하러 온 한국 남성과 현지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말한다. 7~8년 전만 해도 1000여명 선으로 파악된 코피노가 지금은 1만명을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베트남에서 사회문제화됐던 '라이따이한'이 40년이 지난 지금 필리핀에서 '코피노'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혼인을 통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의 코피노는 아버지가 한국으로 가버린 채 필리핀 편모 밑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면 코피노를 만든 한국 남성은 누구일까. 필리핀에 어학연수 오거나 유학 온 20대 학생들이 9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여기에 관광이나 사업차 들른 일부 남성도 '코피노 아빠'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필리핀 한인회가 파악한 이민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필리핀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60만명 정도이며 이 중 15만명이 어학연수나 유학 온 학생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초·중학생과 여학생을 포함한 숫자로 10대 후반~20대 중반 남학생 숫자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수만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미국의 절반 비용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이유로 2000년대 초반부터 필리핀 어학연수생이 급증하고 있다.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가톨릭 신자가 필리핀에 많은 것도 코피노 증가에 한몫하고 있다. 여기에 스페인과 미국 등 오랜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어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데다 국제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원하는 필리핀 여성이 많은 점도 한국 남성의 탈선을 부추기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이곳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도 한국 유학생을 '백마 탄 왕자'로 둔갑시켰다. 마닐라는 물론 앙헬레스·세부 등 유흥가 밀집 지역에는 매일 밤 필리핀 여성을 사려고 하는 한국 남성의 모습이 발견된다. 어학연수생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엔 필리핀 여성을 사귀는 방법과 그 경험담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다.

코피노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성들은 다니던 직장이나 학업을 포기하고 유흥업소에 취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식 룸살롱을 재현한 'K-TV'에는 코피노를 키우는 미혼모 종업원이 최소 서너 명씩 일하고 있다. 일반 직장 임금은 한 달에 30만~40만원이지만, 업소에선 평균 100만원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코피노 문제는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고 필리핀에 반한(反韓)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쇼핑몰 직원 안젤라(21)는 "주변에 한국 남학생 아이를 혼자 기르는 친구가 여러 명 있다"며 "친구도 바보이고, 그 한국 애인도 역겹다"고 했다.

필리핀 교민회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인총연합회 관계자는 "코피노 문제로 국가 이미지가 깎이고 있다. 코피노 가정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등 실질적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