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인문 출판사 관계자를 만났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회사 책 최대 고객은 다른 인문 출판사 편집자들일 겁니다." 대중은 베스트셀러에만 촉각을 곤두세운 지 오래다. 그러니 애써서 인문교양서를 내봐야 잘 팔리는 건 꿈도 못 꾼다. 기껏해야 평소 인문에 관심 있는 출판 동업자들끼리나 '저쪽에선 무슨 책 냈나' 궁금해 사 보는 정도가 됐다는 자조(自嘲) 섞인 얘기다.

▶기초 학술서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고전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더 심각해진다. 어느 학자가 평생을 바쳐 내놓은 저서의 발행 부수가 500권 정도, 그나마 팔리는 데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저자는 연구 의욕이 꺾이고 출판사는 현상 유지도 어렵게 된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지적(知的) 작업의 생산·유통이 이렇게 황무지처럼 돼 버리면 그 사회의 앞날은 물어보나 마나다.

▶27년 전 대우학술총서가 김방한 교수의 '한국어의 계통'을 첫 권으로 탄생했을 때 이 총서의 장래를 낙관한 사람은 없었다.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나는 돈 버는 재주만 있지 쓰는 재주는 없다"며 사재 250억원을 내놓아 대우재단을 세운 게 계기였다. 이용희·신일철·노재봉·김용준 교수들이 모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을 책으로 내자고 방향을 잡았다. 그들은 "안 팔릴수록 축하받는다"는 믿음으로, 중요하지만 대중은 몰라주는 학술서 목록을 하나하나 늘려갔다.

▶신용호 교보문고 창립자의 아호를 딴 대산문화재단은 2001년 영국 전위소설 '트리스트럼 샌디'를 시작으로 대산세계문학총서를 냈다. 그동안 국내 세계문학전집들은 대부분 영어권과 유럽어권의 잘 알려진 작품들에 머물렀다. 대산총서 선정위원들은 '읽고 싶었지만 어렵거나 상업성이 없어서 읽을 수 없었던 숨은 명작'을 찾기로 뜻을 모았다. 한국인이 접할 수 있는 해외문학의 스펙트럼이 21개국 16개 언어로 늘어났다. 그중 80%가 국내 초역(初譯)이다.

▶대우학술총서와 대산세계문학총서가 최근 잇달아 각각 출간 600종과 100종을 돌파했다. 국가가 나 몰라라 하고 사회가 알아주지 않을 때 뜻있는 기업과 학자가 힘을 합쳐 이뤄낸 기적 같은 열매다. 우리 사회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려 한다면 우선 국·공립 도서관과 대학도서관들부터 인문교양서 한 권씩 더 사기 운동을 펼치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