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팔이 말을 안 들었다. 어깨 연골이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 23일 그레코로만형 120㎏급 1회전에서 탈락한 레슬러 김광석(33·사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다시 레슬러가 됐잖아요. 그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죠."

20대 초반의 그는 96㎏급 특급 유망주였다. 그 재능이 술에 가로막혔다. "1년에 1억원 가까이 만지는데 운동이 좋을 리 없잖아요." 매일 밤 술독에 빠진 그는 어느새 아무도 찾지 않는 레슬러가 됐다.

막노동을 했다. 울산의 한 공장에서는 기계 기름때를 벗겼다. 술은 그의 유일한 벗이었다. "밑바닥 인생, 그거 잊으려 술을 마셨고 술이 또 나를 마셨고…." 그러던 2005년 1월 수원시청에서 동아줄을 내려줬다.

타고난 힘과 유연성이 좋은 김광석이 언제든 일어설 수 있는 레슬러라고 판단한 것이다. 김광석은 기회를 꽉 잡았다. '다시는 운동을 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고 구역질을 참아가며 훈련만 했다.

2006년 그는 도하대회 120㎏ 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런데 하늘은 힘들게 일어선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허리 디스크로 두 다리를 움직이기 어려웠다. '왜 나만…'이라는 분노가 치솟았다. 또 술을 마셨다. 알코올 의존증에 가까웠다.

김광석은 운동을 그만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5년 그를 일으켰던 수원시청 박노학 감독이 2009년에 다시 김광석을 잡아 세웠다. "여기서 그만두면 뭐 할래. 아시안게임 2연패는 해야 지도자라도 할 것 아니냐!"

김광석도 '불쌍한 레슬러'가 되긴 싫었다. 무직인 아버지와 식당일 하는 어머니가 떠올랐다. 다시 바깥세상과 연락을 끊었다. 1년간 처절한 재활로 허리도 나았고 지난 4월 선발전에서 당당히 대표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올 6월 선수촌에서 스파링하다 왼쪽 어깨의 연골이 찢어졌다. 수술하면 아시안게임은 끝이었다. 김광석은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다. "선수촌에서 쫓겨날까 봐 무서웠어요. 진통제만 의지했죠."

이런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이라크의 강호 알리 살라미는 자신보다 몇 배는 강했다. 결국 한 점도 못 따내고 졌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앞으로 뭐 할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 영원히 레슬러의 마음으로 지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