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논설위원

"나에게는 이 여자가 김태희전도연이다"라는 TV 드라마 대사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 꽃미남 배우 현빈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오는 대사다. 재벌 2세에 얼굴까지 잘생긴 현빈이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사는 여자(하지원)를 가리켜 '나의 이상형'이란 찬사를 던진 것이다.

이렇게 여성 시청자를 사로잡는 꽃미남 현빈 덕분에 느닷없이 시집이 잘 팔리고 있다. 현빈이 진동규 시인의 시집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을 읽는 장면 덕분이다. 현빈이 시집을 서가에 꽂으면서 옆에 나란히 있던 다른 시집들도 클로즈업됐다. 홍영철 시집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황동규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인숙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김성규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였다. 시집 제목들이 한 행 한 행 화면에 자막으로 뜨면서 시 한 편이 만들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너는 잘못 날아왔다.'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한 가슴속에 우연히 사랑하는 사람이 걸어 들어왔지만 그 소중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아 침울하기에 '너는 잘못 날아왔다'고 탄식하는 시가 됐다.

화면에 제목만 나온 시집 5권을 낸 출판사에는 하루에 권당 200~300부씩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시집 초판을 1500부 정도 찍는 출판 풍토에선 신기한 일이다. 드라마에서 연애시 몇 줄을 배우가 읊어서 감정 표현을 하면 당연히 그 시가 인구에 회자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시집 표지만 보고 시청자들이 충동구매하는 현상은 보기 드문 일이다.

문학 기법으로 풀이하자면 이번 일은 '패러디'의 승리다. 시집 제목을 나열해 한 편의 시를 빚어낸 것은 문학에서 낯선 일이 아니다. 시인 함기석은 '생은 다른 곳에'란 시를 내놓았다. '자작나무 숲에서/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장미의 벼락 속에서/ 바다와 사막을 지나…'라는 시에서 각 행은 예세닌, 츠바이크, 바하만 같은 외국 작가들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생은 다른 곳에'란 시 제목도 랭보의 시와 쿤데라 소설에서 빌린 것이다.

문학이든 영상물이든 내용 못지않게 제목이 성공 요인의 '팔(八) 할'을 차지한다고 한다. '여자는 얼굴로 소설을 쓴다'는 말이 있듯이 창작(創作)도 화장발 효과를 톡톡히 보는 법이다. 지금 신춘문예 마감을 앞두고 한창 작업하고 있을 문학 청년들이 새겨들었으면 한다. 심사위원들 옆에서 응모작들을 힐끗 들여다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응모자의 솜씨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정현종의 시 '고통의 축제'처럼 명사형으로 할 것이냐, 문정희의 시 '다산의 처녀'처럼 모순어법을 쓸 것이냐, 김민정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처럼 서술형으로 할 것이냐, 김영하 소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처럼 과감하게 미완성 문장을 택할 것이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수북이 쌓인 원고 뭉치 속에서 좋은 제목은 유난히 빛나기 마련이다. 신춘문예의 좁은 문에 도전하는 문학 청년들이여, "나에게는 이 작품이 김태희고 전도연"이라고 자신할 정도로 치열하게 써라. 아깝게 낙선하더라도 문학과의 황홀한 연애라는 추억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