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2시 서울 구로구 구로동 영림중학교 앞 화단에서 모자를 눌러쓴 40~60대 구청 일용직 여성 10여 명이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 뒤에서 180㎝ 키에 우락부락한 오승찬(47)씨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잡초를 실은 손수레를 끌었다. 김정순(61)씨가 "쉬엄쉬엄 하세요"라고 말하자 오씨는 "점심에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왔더니 힘이 펄펄 나요"라며 웃었다. 김씨는 "오씨가 구청 인부들 중에 제일 힘이 세지"라며 "땅 팔 때도, 무거운 돌 들 때도 궂은 일은 제일 먼저 나선다"고 했다.

지난 3월 서울 구로구청 기간제 근로자로 채용돼 지역 내 가로수 관리와 공원 청소 등을 하는 오씨는 살인죄로 1984년부터 14년간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했다. 1979년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사업한다며 지방으로 내려가자 오씨는 건달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 영등포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던 그는 "집에 홀어머니와 남동생을 두고 매일 술을 마시고 싸움을 했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동 영림중학교 화단에서 장기복역수 출신인 공공 근로자 오승찬씨가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그러던 1984년 9월 서울 영등포의 한 포장마차에서 지인과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자 오씨는 홧김에 옆에 있던 흉기로 그를 찌르고 말았다. 그 사람은 과다 출혈로 숨졌다. 오씨는 "어떤 벌로도 내 죗값을 치를 수 없다는 걸 안다"며 고개를 숙였다.

오씨는 198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충격으로 쓰러졌던 어머니 김금례(당시 51)씨가 매달 교도소를 찾아가 아들 얼굴을 봤다. 오씨는 "어머니를 만나고 감방에 돌아올 때면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얼른 출소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오씨는 '재소자 총 반장'을 맡으며 모범적으로 생활했다.

오씨는 감형(減刑)을 받아 14년 만인 1998년 12월 출소했다. 서울 구로구 개봉동 반지하 방에 어머니와 살며 어머니가 평생 국밥을 팔아 모은 돈 1000만원으로 실내 포장마차를 차렸지만 손님이 없어 1년 만에 접었다.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전과자인 오씨를 채용하는 곳은 없었다. 절망한 오씨는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술집에서 손님과 싸우고 합의금 1000만원이 없어 안양교도소에서 또 3년을 복역했다. 2005년 5월 출소하고서도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 지방에서 사업에 실패한 형이 제초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형의 자살 직후 몸져누운 노모(老母)를 본 뒤 오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막노동에 나섰다. 가장(家長)이 된 오씨는 "이제 우리 모친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술·담배도 끊고 하루 10시간씩 일을 했다.

지난 2월 오씨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 영등포교도소측이 오씨를 구로구청에 추천했다. 양대웅(68) 당시 구로구청장은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3월 1일 오씨를 구청 기간제 근로자로 채용했다. 장기수가 구청에 채용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지난 4월과 7월 구로구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잘했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오씨는 지난 4월 3일 첫 월급을 받아 어머니와 동네 돼지갈비집에 갔다. 허리디스크로 거동이 불편한 70대 노모는 아들이 구워주는 고기를 입에 넣으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오씨는 "어머니가 '고맙다'는데 콧등이 시큰거려 한참 동안 고개를 못 들었다"고 했다.

이달 말이면 기간제 고용 계약이 만료되는 오씨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오는 25일부터 접수가 시작되는 '2010 서울특별시 구로구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응시해 정식 환경미화원이 되는 것이다. 아직 집행유예 기간(내년 6월)이 남아 채용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퇴근 후 줄넘기를 하며 체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구청 일을 하면서 태어나서 처음 '보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통장도 만들었어요. 정식 공무원이 돼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효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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