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삶보다는 온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성공이 삶을 온전하게 해주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상처와 쓸쓸함을 받아들여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정희(63) 시인이 열한 번째 시집 '다산의 처녀'(민음사)를 냈다. 1969년 등단 이후 생(生)의 열정을 불사르는 여성의 삶을 노래해온 그녀가 이번에는 분위기를 일신해 쓸쓸함과 고통에 눈을 돌렸다. 삶이 부과하는 아픔을 힘차게 극복하라고 독려하기보다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조심스럽게 어깨를 다독여주는 할머니와 엄마와 아내의 모습이 뚜렷하다.

11번째 시집을 낸 문정희 시인은“40년 넘게 시를 쓰고 있지만 매번 첫 시를 쓰는 것처럼 설렌다”고 말했다.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수록시 '쓸쓸').

문 시인은 일상의 풍경에서 시를 부화시켜 왔다. 결혼이라는 일상도 그녀가 즐겨 쓰는 소재이다. '인생은 짧고 결혼은 왜 이리 긴가/(…)/ 봄은 가는데/ 꽃들은 얼마나 더 소리쳐야 무덤이 될까/'라는 시 '비극배우처럼'과 '결혼은 푸른 꽃 만발한 고통의 신전'이라는 시 '지금 장미를 따라'에 그녀는 삶의 쓸쓸함을 담는다. 공자는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꽃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수록시 '오십세')

그러나 문정희 시인에게 상처는 쓰라린 패배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그 아픔이 나를 깨어 있게 하고 생의 파도를 건너게 하는 힘과 용기, 더 나아가 아량까지도 가르친다"고 말했다. '활기는 내 슬픔의 진액, 외로움이 내뿜는 윤기이다/(수록시 '꽃이 질 때')라며 슬픔과 외로움을 끌어안고, 내면의 고독이라는 새로운 음역(音域)을 듣는 성능 좋은 귀도 얻는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지만/ 내 앞에 찍힌 발자국을 홀로 꺼내 볼 때가 있다/ 거기에 담긴 폭풍과 난파와 침몰의 음률을 듣는다.'(위의 시)

문정희 시인은 인생이라는 새신랑 앞에 서면 늘 가슴이 떨리는 처녀다. 11권의 시집을 냈음에도 시인은 '나 처음 시를 쓴다/ 그동안 몇 권의 시집을 낸 기억이 있지만/ 오늘 비로소 처음 시인이다'(수록시 '사랑 비슷한 사랑')고 말한다. '다산(多産)'과 '처녀'라는 모순적 표현이 그녀의 시집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문정희 시인은 최근 들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유럽' 2009년 가을호가 그녀의 시 세계를 조명하는 특집에서 '진정한 목소리의 시'와 '진정한 삶의 시'라고 평가한 데 이어 오는 11월에는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들에게 주는 '시카다 상'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