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한 아파트에서 조귀진(60)씨가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에 송편과 떡, 과일 등을 정성껏 담고 있었다.

"우리 아들하고 처음 맞는 추석인데, 신경 좀 써야지." 연한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씨는 이른 아침 미용실에서 머리도 하고 왔다.

거실과 부엌을 오가며 부산하게 움직이던 조씨는 오후 1시가 되자 아파트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 앞에는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민윤기(34)씨가 승합차에서 막 내리고 있었다. 조씨는 "아이고 우리 아들! 우리 윤기 왔네!"라며 민씨를 얼싸안았다. 민씨는 "잘 지내셨는지 한 번 업어볼게요"라며 조씨를 한 번에 등에 업었다. "나 살쪄서 54㎏이나 되는데…"라는 조씨와 "이렇게 가벼운 걸요 뭘~" 하며 장난치는 두 사람은 영락없는 친모자(母子) 같았다.

장기기증으로 모자(母子) 인연을 맺은 지 8년째인 조귀진(사진 왼쪽)씨와 민윤기씨가 추석을 앞둔 18일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에서 만나 서로를 보며 환히 웃고 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두 사람은 7년 전인 2003년 5월,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전남대병원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94년 설날, 거실에서 할머니께 세배하다가 그대로 쓰러진 뒤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은 민씨는 9년 만에 조씨로부터 신장을 기증받아 새 삶을 찾았다.

민씨는 "수술실에 누웠을 때 옆방에 있을 기증인을 생각하며 '생면부지(生面不知)인 내게 신장을 주시다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고 했다"고 말했다. 수술 일주일 뒤 신장 기증인 조씨가 회복 중인 민씨를 찾아왔다.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는 장기기증인과 수혜자를 서로 비밀에 부치게 하고 있지만,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700번째 장기기증을 맞아 그 주인공인 민씨와 조씨를 만날 수 있게 해줬다. 민씨는 자상하게 "괜찮으냐"고 챙겨주는 조씨를 보며 '내게 새 인생을 주신 이분께 평생 보답하며 살아야지'하고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어머니와 아들처럼 지내왔다. 아들 없이 다섯 딸을 둔 조씨는 신장이식으로 아들을 얻었고, 민씨에겐 '제2의 어머니'가 생겼다. 힘든 투석으로 2년도 안 돼 대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민씨는 건강을 되찾고 공부에 매진했다. 마침내 2007년 10월,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현재 전남도청에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광주에 사는 아들과 대전에 사는 어머니는 지난 7년간 각자의 친척들을 방문하느라 명절에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민씨는 매년 명절마다 조씨에게 화장품, 해산물, 완도 특산품 등 직접 고른 선물을 보내면서도 조씨를 직접 뵙고 명절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고 한다. 마침 올해 긴 추석 연휴를 맞아 처음으로 대전에 있는 조씨를 찾았다.

조씨는 거실에 앉자마자 "그때는 그렇게 새까맣고 조그맣더니 볼 때마다 이렇게 훌쩍 커지고 예뻐지느냐"며 민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처는 어떻게 됐니"라며 민씨의 왼쪽 팔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죠"라며 환히 웃으며 긴 팔 셔츠를 걷어올린 민씨의 왼쪽 팔에는 군데군데 혈관이 1㎝ 이상씩 부어올라 있었다. 민씨의 팔에 남은 투석의 흔적을 바라보는 조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자 민씨가 얼른 갈색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올해는 더 아름다워지시라고 목욕 세트 준비했어요." 상자에 든 샴푸, 린스, 보디워시를 보며 조씨는 "이렇게 비싼 걸 어떻게 쓰니. 장에 넣어두고 아껴야겠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조씨의 막내딸 원하은(10)양이 "엄마 또 만날 윤기 오빠가 줬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겠다"며 까르르 웃자 민씨와 조씨도 함께 웃었다. 조씨는 "윤기가 내 제일 큰 자랑거리"라고 했다. "요즘 대학 제대로 나온 사람들도 취업이 어렵다던데. 몸도 성치 않은 애가 공무원이 됐잖아.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어?"

조씨는 "바빠도 건강관리가 제일이다"라고 말하며 민씨에게 직접 담근 포도즙을 챙겨주었다. 민씨는 "감사해요.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라며 조씨를 꽉 안았다. 조씨가 "말 나온 김에 같이 운동이나 하자"며 민씨 손을 붙잡고 집 근처 우성이산으로 산책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