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 모양을 한 허민식씨의 열기구‘HUR-NR001’.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동력비행기 '플라이어 1호'를 타고 12초간 하늘을 날았다. 120여년 전 비슷한 꿈을 꾼 이가 있었다.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였다. 1783년 그들은 높이 23m, 둘레 14m의 물체를 하늘에 띄웠다. 열기구였다.

허민식(42)은 초음속 비행기가 종횡하는 시대에 국내 최초로 직접 제작한 열기구를 타고 비행을 즐긴다. "그 안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요. 저만큼 한국의 속살을 많이 본 사람이 있을까요?"

■군에서 키운 열기구의 꿈

경북 포항 출신인 허민식씨는 1988년 육군 3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공수 교육 때 낙하산을 타면서 내려다보는 기쁨을 알게 됐어요. 세상이 발밑에 있는 느낌요." 교육 후 그가 배속된 곳은 국방부 소속 대북선전단이었다.

허씨는 거기서 3~4㎏ 소형 열기구에 '삐라', 라디오, 시계, 생필품을 넣어 북으로 날렸다. "이걸 원했던 지점으로 보내려면 고도에 따른 바람 세기와 방향을 정확히 읽어야 합니다. 그때 바람의 맛을 알게 된 거죠."

93년 대위로 전역한 허씨는 평범한 회사원이 됐지만 그 맛을 못 잊었다. 처음엔 패러글라이딩을 했는데 돌풍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뒤 공포증이 생겼다. "빠른 건 못 타겠더라고요. 그때 열기구 생각을 했죠."

상승과 하강만 하는 열기구는 고도에 따라 다른 바람을 이용해 이동한다. 관성의 법칙 때문에 바람이 어떤 속도로 불어도 사람이 탄 바스켓 안에선 느끼지 못한다. "밖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안에 있으면 평화로워요."

■스스로 열기구를 만들다

500만원짜리 미국제 중고 열기구를 타던 허씨는 자신만의 열기구를 가지고 싶었다. 1997년 일본에서 만난 현지 과학 교사가 학생들과 만든 열기구를 보여줬을 때 허씨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이듬해 회사 기숙사 지하에서 열기구 제작에 착수했다. 국내 첫 시도라 '맨땅에 헤딩'이었다. 외국 홈페이지를 밤낮으로 뒤지다 가로 1m, 세로 2m의 천 조각 500개를 이어붙이기 위해 CAD(컴퓨터이용설계)를 따로 배웠다.

돈을 마련하려고 적금을 해약하고 승용차를 팔았다. 부지기수로 밤을 지새운 작업의 마지막 고비는 풍선에 색을 입히는 일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풍선에 축구공 모양을 그렸다.

1주일 이상 잉크를 칠하고 나니 독한 냄새가 코에 배어 한동안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높이 25m, 무게 200㎏의 열기구 'HUR-NR001'이 완성됐다. 99년 6월 창원에서 처음으로 그는 열기구를 띄웠다.

■휴전선 위를 날고 싶다

허씨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커피 한 잔을 하는 맛에 열기구를 탄다고 했다. 여주의 신륵사, 진안 마이산, 아산 도고산 등이 허씨가 열기구에서 경험한 절경으로 꼽는 곳이다.

국내엔 열기구가 이·착륙할 넓은 평야가 드물기 때문에 주로 논에서 뜨고 내린다. 번잡한 도시에선 비행 허가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열기구 시즌이 벼를 수확한 11월에서 논에 다시 물을 대는 3월까지인 이유다.

남의 논에 착륙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한국 특유의 시골 인심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한 번은 논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막 뛰어오시더라고요. 괜히 긴장했더니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열기구 비행 시간은 보통 한 시간이다. 바람에 운명을 맡기니 별일이 다 일어난다. 2004년 논산 하늘을 날다 착륙 지점을 놓쳤다. 겨우 운동장 하나를 발견하고 내린 곳이 하필이면 공주교도소 운동장 한복판이었다.

구제역이 돌 때는 방역 요원들이 작업하는 목장에 떨어져 '소독약 세례'를 맞았다. 공군 레이더에 걸려 정찰기가 뜬 적도 있었다. "외국인들은 한국에선 안 타려고 해요. 전봇대가 워낙 많은데다 고압선을 피해야 하니까요."

허민식씨는 지난해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놀이터를 지어주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일에 치여 살지만 11월 첫째 주는 올해도 비워 놓았다. 일본 사가(佐賀)현에서 열리는 '열기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허씨에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군 생활 당시 북녘 땅을 보며 '언젠가는 저곳에서 열기구를 타겠다'는 결심을 했다. "휴전선 156마일을 따라 비행하고 싶어요. DMZ의 자연을 만끽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