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공기업이 변호사를 한 명 뽑았다. 제시한 조건은 평사원 직급에 연봉은 대졸 3년차 정도였다. 다른 대졸 신입사원과 똑같은 조건인데, 사법연수원 경력만 2년 인정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10명이 넘게 지원했다.

10여년 전에는 변호사가 기업에 가면 곧바로 부장급 간부가 될 수 있었지만, 최근엔 대리나 심지어는 사원으로 입사시키는 회사도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다. 사법연수원 수료자가 매년 1000명씩 쏟아지자 변호사 '몸값'이 내려가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SK그룹에선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변호사에게 대리 직급과 함께 대리 3년차 연봉을 준다. 이들 '대리 변호사'들은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업무성과를 평가받고 다음해 연봉계약을 한다. 한 중견 제약업체는 연봉 5000만원을 주는 대리로 변호사를 뽑았다. 변호사를 채용 중인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은 직급·연봉도 제시하지 않은 채 "원하는 연봉을 적어내면 나중에 협의하자"는 식의 채용 조건을 제시했지만 지원자는 줄을 잇고 있다.

삼성·LG·현대차·포스코 등 SK를 제외한 10대 그룹 상당수는 '변호사 신입사원'에게 과장 직급을 준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과장으로 뽑지만 대리 직급을 준다고 해도 지원자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경력 5년의 변호사를 과장으로 영입했는데 대졸 공채 출신 과장들보다 나이가 많았다"며 "사시에 합격하면 출세를 빨리한다는 게 옛말이라는 걸 실감했다"고 전했다.

사무실을 따로 주거나 비서나 운전기사를 붙여주는 예우도 거의 없다. 포스코에 다니는 A변호사는 "책상을 둘러싼 칸막이가 조금 더 높을 뿐 다른 대우는 일절 없다"고 말했다.

기업체 취업이 쉽지도 않다. 사법연수원생들은 회사마다 최소 5대1 이상의 경쟁을 치른다. 10대 그룹에 취직하려면 대체로 연수원 성적이 500등 안쪽에는 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형 법무법인이나 개인 변호사 사무실 취업보다는 안정적이고, 대우도 낫다는 이유로 기업으로 가려는 연수원생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수료한 사법연수원 39기생 중 6월까지 모두 61명이 기업에 취업했다.

이외에도 변호사 몸값이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K씨는 법원행정고시와 사법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후에 변호사 대신 법원에서 사무관으로 3년쯤 일했다.

헌법재판소는 올해 김택수 사무차장의 비서관을 변호사로 뽑았다. 그동안 쭉 일반직 공무원이 맡던 자리다. 2008년 헌재가 처음으로 사시 출신을 헌법연구관이 아닌 일반행정직으로 한 명 뽑았을 때에도 10명 안팎이 지원했다. 경찰청이 올 초 사시 출신 경정특채 공고를 내자 3명 모집에 무려 112명이 지원, 경찰 관계자들이 놀라기도 했다. 한 결혼정보업체 관계자는 "결혼 상대자로 변호사보다 대기업 사원이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편 사법연수원 집계 결과, 지난 6월 말까지 취업을 못한 39기 수료생은 모두 33명이었다. 그중 여성이 20명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