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입' 역할을 하는 청와대 대변인은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77년 작고)씨에서 비롯된다. 김씨는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의 첫 공보비서관으로 그해 8월 임명됐다.

시인으로 일제 식민지 때 교육자와 언론인으로 활동한 그는 광복 후 미군정청 공보국장을 하다 발탁됐다. 당시 대통령비서관 직제에는 비서관장(현재의 대통령실장에 해당) 밑에 정무 3명, 공보·서무·문서 각 1명씩 등 8명의 비서관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사무분담 규정(안)에 따르면, 공보비서관은 공보에 관한 사항뿐 아니라 대통령에게 접수된 진정서·건의서 검토, 사상대책과 정보수집 등 민정(民情)에 관한 사항까지 맡았다. 공보비서관 취임 직전인 1948년 8월 4일 이 대통령의 첫 조각(組閣)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김 전 비서관은 유신(維新)체제가 등장한 이후인 1974년 '대통령'이란 시를 써 우회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비판하기도 했다.<사진>(1974년 서울 성북동 자택 서재에서 집필 중인 시인 김광섭씨)

청와대 대변인이란 직함을 처음 쓴 이는 윤보선 대통령 때 신문기자 출신의 김준하(80)씨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그해 8월 취임한 윤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거주 공간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꾸고 국무원령 제66호로 대통령비서실 직제를 제정하면서 공보비서관과는 별도로 대변인 직제를 신설했다.

김씨는 윤 전 대통령이 5·16으로 사실상 실권(失權)하고 62년 3월 사임하게 되자 대통령 하야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15일 윤 전 대통령 20주기 추모식 강연에서 윤 전 대통령이 5·16을 주도한 군부에 협력했다는 설(說)은 오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의 첫 청와대 대변인은 군인 출신인 이후락(2009년 작고)씨였다. 5·16후 구성된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했던 그는 1963년 12월 민정(民政) 출범과 함께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으나 마땅한 대변인을 찾지 못해 4달여간 비서실장과 대변인을 겸직했다.

그는 이후 주일대사·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1970년대 가장 오랫동안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이는 1971년 7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4년5개월간 역임한 김성진(2009년 작고)씨로 박 전 대통령의 '입'으로 불렸다. 그는 이후 정부 대변인격인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임명돼 10·26사태 직후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직접 발표했다.

최규하 대통령 때는 언론인이자 소설가 출신인 서기원(2005년 작고)씨가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고,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는 4·19혁명 당시 서울대 시위를 주도한 대학 동기생인 황선필·이수정씨가 각각 청와대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에선 2002년 박선숙(현 민주당 의원)씨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청와대 대변인에 발탁됐다. 노무현 정부 때도 첫 대변인에 송경희씨가 임명돼 2대 연속 여성 대변인 기록을 낳았다.

현 정부 들어서는 신문기자 출신인 이동관씨가 초대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고 이후 홍보수석 직제가 신설되면서 산하에 방송기자 출신의 박선규·김은혜 2인 대변인 체제를 도입했다가 최근 17대 국회의원 출신의 김희정(39)씨가 대변인에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