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

17일 아르헨티나전을 파주 국가대표 훈련센터에서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보면서 내가 뛰었던 과거 두 차례의 월드컵 경기가 생각났다. 1994 미국월드컵 독일전(2대3)과 1998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0대5)이다. 두 경기 모두 세계 정상급 팀과의 경기에서 패했지만 앞 경기에선 박수를 받았고 나중 경기에선 박수를 받지 못했다. 독일전에서는 투지를 갖고 싸웠지만 네덜란드전에서는 이것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결국 세계 최강 팀과 경기하려면 한국은 투지를 갖고 싸워야 한다. 투지는 이들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한국팀의 유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후반 초 득점 찬스를 놓친 뒤엔 한국이 무너진다는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다.

큰 점수 차는 앞으로 경우의 수를 따질 때도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더 큰 문제는 선수들의 사기(士氣)다. 이미 남아공월드컵에서 두 경기를 치른 우리 선수들은 정신적·체력적으로 엄청나게 지쳐 있을 것이다. 월드컵의 한 경기는 다른 대회의 몇 경기를 치르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큰 부담을 준다. 체력도 많이 떨어졌을 텐데 골까지 많이 허용했으니 사기가 떨어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한국팀에 가장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평상심을 되찾느냐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장 박지성과 고참 선수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비록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어도 나이 많은 형들이 때로는 질책하고, 때로는 보듬으며 후배들을 격려하면 선수들은 금세 그리스와의 1차전에서 보였던 '즐기는 축구'를 되찾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박주영이 가장 걱정된다. 아르헨티나전 첫 실점은 박주영의 잘못이 아니다.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스전에서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해 가뜩이나 부담이 컸을 텐데 이번 자책골까지 더해져 주영이의 마음은 더 무거울 것이다. 하지만 주영이는 주변의 비난을 의식할 겨를이 없다. 남은 나이지리아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너무나 막중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전에서 우리에겐 운도 따르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세 번째 골은 모두 오프사이드 느낌이 강했다. 물론 아르헨티나와의 실력 차는 분명히 있었고, 우리가 이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아르헨티나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기면 좋겠지만 무승부와 패배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4년 전엔 2차전에서 강호 프랑스와 비겼다고 좋아했다가 마지막 스위스전을 놓치면서 탈락하지 않았는가. 이번엔 거꾸로 3차전을 이기면 사상 첫 원정 16강이 가능하다. 후배들이여, 실망하지 마라. 실망하기엔 너무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