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백 년간 에게해(海)와 키프로스의 영유권 다툼을 벌여온 터키그리스는 앙숙 같은 존재다. 그런데 요즘 터키인들은 그리스 얘기만 나오면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올 들어 그리스가 재정위기로 파산 직전인 반면 터키는 6%대의 성장이 예고되는 등 경제가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터키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그리스(3만 달러)의 3분의 1 수준인 9000달러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터키인들의 입가에 번지는 회심의 미소를 짐작할 만하다. 그리스가 과도한 복지와 방만한 재정 지출로 경제위기의 수렁 속에 빠져들어 가는 사이 터키는 인프라 구축 등으로 투자 환경을 개선하면서 각국의 돈이 몰려들고 있다. 14일 이스탄불 시장에서 만난 상인 세이피 타샨씨는 "민족적 자긍심을 느낀다"고 했다.

붉은 색 바탕에 초승달과 별 모양이 그려진 대형 터키 국기가 지난 14일 이스탄불 시내 탁심광장의 한복판에서 펄럭이고 있다. 이 광장 내에만 10여개의 중소형 국기가 더 게양돼 있을 정도로 터키 국민들의 국기 존중 정신은 특별하다. 일부에선 터키를‘국기공화국’이라 부른다.

터키인들의 이런 자긍심은 '국기(國旗) 존중' 문화로 표현되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나 국기를 쉽게 볼 수 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회사 건물이나 산등성이, 아파트·단독주택 외벽엔 거의 예외 없이 국기가 걸려 있거나 부착돼 있다. 불과 1주일 전 입주를 마친 이스탄불 세츠메 거리의 아파트에서는 24가구 중 절반이 넘는 14가구 대표가 모여 가구당 30터키리라(약 2만2400원)를 들여 국기 게양대를 설치했다.

게양대를 설치할 여유가 없는 이들은 그냥 창문에 터키 국기를 내걸거나 종이로 만든 국기를 붙여놓기도 한다.

이런 터키 국기들이 요즘 부쩍 더 많아졌다. 이스라엘의 터키 구호 선박 공격(5월 말),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키프로스(터키계 무슬림 거주) 방문(6월 초) 등 민감한 사건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견 언론인 차을라르씨는 "터키가 전 세계에서 국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인데다 최근 터키인들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면서 "터키공화국이 아니라 '국기공화국'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터키인들이 국기를 중시하는 배경에 대해선 설이 엇갈린다. 보아지치대학의 케말 키리스치(Kirisci) 교수는 "인구 7256만명 가운데 99%가 이슬람 신자이지만 정교(政敎)분리 원칙 때문에 국가적 정체성이 약화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 대신 국기를 정체성 강화 수단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터키의 지리적 특성상 부족하기 쉬운 정체성의 부족을 메우고 국민을 단합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국기 게양은 물론 정부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국기가 강조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최근 고개를 들고 있다. 변호사 벨마 일마즈(Yilmaz)씨는 "얼마 전 국기를 훼손한 사람에 대해 터키인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폭행 사례가 발생하는 등 터키 사회에서 국수주의(國粹主義) 조짐이 나타나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