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흥덕구의 한 다세대주택 1층에서는 매일 오후 7시가 되면 이 건물에 사는 21명이 모여 식사한다. 30~40대 남자 20명과 유일한 여성 나호견(60)씨다. 남자들은 나씨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한다. 때로 "교도소에 갔다 온 게 알려져 직장 다니기 싫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그럴 때면 나씨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야!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해. 그리고 깔보는 사람한테 가서 똑바로 말해. '너, 직장생활 나만큼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남자들은 교도소 출소자들이다. 여기서 먹고 자며 일을 해 자립할 자금이 모이면 떠난다. 나씨가 이들을 돕는다. 그는 2005년 교화(敎化)복지 사단법인 '뷰티풀라이프'를 만들어 이곳에 숙소를 차렸다.

나호견씨는“20년이나 함께 살아보니 절반 이상 새 사람이 되더라”며“우리 모두 편견을 거두고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씨는 6년 전까지만 해도 수녀였다. 출소자 봉사활동을 놓고 수녀원과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해 수녀복을 벗었다. 나씨는 "신부님들에게 혼도 많이 났다. 하지만 나는 교도소 재소자와 출소자를 위해 수녀원에 갔기 때문에 뭔가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재소자·출소자들과의 인연은 중학 2학년이던 1964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나씨는 군산교도소 재소자들에게 합창을 가르치는 성당 봉사활동을 갔다가 '살인범'을 만났다. 자기를 키워준 부모 같은 친누나를 기절하도록 때리고는 옆에서 태연히 술 마시는 매형에게 화가 치밀어 때렸다가 그만 숨지게 해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었다. 나씨는 "교도소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

나씨는 1972년 스물둘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6년 경주의 한 성당으로 옮겨가면서 재소자들을 만났다. 성당은 경주교도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씨는 거기서 40명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당수 출소자는 3~6개월 뒤면 재수감됐다. 그들은 "일자리도 없고 가족도 등지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수녀님이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나씨는 수녀원과 가족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외면당했다. 나씨의 가족조차 "할머니나 고아랑 사는 수녀는 봤어도 출소자랑 살겠다는 수녀는 못 봤다"며 말렸다.

그는 1992년 지인들로부터 6000만원을 모아 대구 월성동에 아파트 2채를 얻어 출소자들과 생활하며 사회적응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1997년 IMF 위기가 닥치자 어렵사리 취업시킨 15명 모두 해고당했다. 전과자였기 때문이다. 나씨는 "사람들이 '쓰레기'라고 무시하는 전과자도 쓸 만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 뒤 나씨는 출소자들과 두부를 만들어 팔고 생선장사도 했다. 쉽지 않았다. 나씨는 "단골마저도 직원들 신분을 알고 나면 발길을 끊곤 했다"고 말했다. 요즘은 택배회사에서 일감을 받아 출소자에게 배달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