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은 왜 자신의 어머니를 그렸을까. '어머니를 그리다'의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이다. 그저 어머니가 마침 곁에 있고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얼굴이 흥미로워서? 나는 전자(前者) 쪽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예술가란 대체로 그렇지 않은가. 충실한 가장, 인자한 아버지, 효심 지극한 자식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 아닌가. 렘브란트, 세잔, 고갱, 고흐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과 코코슈가, 앙소르, 아실고키 등 낯선 작가까지 줄잡아 오십여 화가의 그림을 소개한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노라면 그런 선입견이 조금씩 사라진다.

앞치마를 두르고 벽난로 앞에 서 있는 샤갈의 어머니나 자수 놓기에 몰두한 카유보트의 어머니처럼 일상적인 모습도 있고 귀부인의 초상을 연상케 하는 마네의 어머니도 있다. 물론 어머니들은 순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지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손자인 화가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벌거벗어 깡마른 몸을 드러낸 그의 연인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방의 원근은 묘하게 뒤틀려 있다. 정지된 장면이지만 마치 움직이듯 느껴지는 그림 속의 어머니는 몹시도 쓸쓸해 보인다. 심리학의 교재로 삼을 만한, 대단히 심리분석적인 그림이다. 그 할아버지의 손자 아니랄까봐.

헨리크 로다코프스키作 '화가 어머니의 초상'.

어머니들의 표정은 다양하지만 그림들을 살펴보면 화가들의 손놀림이 떠오르고 어머니에 대한 속내가 애틋하게 다가온다.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친밀하고 독특한 관계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연대기 순으로 소개된 책을 따라가노라면 수백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 어머니라는 주제의 변모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어머니와 얽힌 사연뿐 아니라 그 시대의 화풍(畵風)과 분위기까지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 책을 덮고 나면 제법 문화인이 된 듯 뿌듯한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그렸을 어머니의 얼굴, 지금 내 곁에 계시는, 혹은 계시지 않는 어머니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랫동안 가정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들이 밀려나고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갈수록 작아져가는 시대에 만난 책 '아버지 다산'은 우리들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다시금 돌이키게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의 이름이야 모르는 이 없겠으나, 그의 시 몇 편을 스치듯 읽은 외에는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만 알고 있는 나 같은 이들에게 이 책은 소중한 지식과 감동을 선사한다.

다산 정약용.

6남 3녀를 낳았으니 다산은 '다산(多産)'한 아버지였으나 그중 6명의 자녀가 요절하는 아픔을 겪었다. 돌을 미처 넘기지 못하고 죽은 자식도 있었으며 더러는 두 살에, 또 두엇은 예닐곱에 아비의 곁을 떠났으니, 그 허망함을 어찌 말로 다할까.

이 책은 18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척박한 유배지에서 편지로써 자식을 혹독하게 원격교육한 강인한 아버지 다산, 가난 속에서도 도덕성을 지킨 아버지 다산, 스물아홉 꽃 같은 나이에 떠난 며느리를 둔 시아버지 다산, 형인 정약전이 처형된 후 정성을 다해 돌보았던 두 명의 조카마저도 17세와 20세에 떠나보내야 했던 숙부(叔父) 다산의 절절한 사랑과 슬픔·한(恨)을 그가 남긴 편지와 시구(詩句)들을 통해 조명한다.

유배되기 이전부터 다산의 집은 가난하여 끼니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니 그가 떠난 후의 삶이야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 아내와 자식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다산이 남긴 편지와 시들은 어느 한 편,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중 유독 마음 아픈 한 구절을 보면, '손님이 와 내 문을 두드리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내 아들이었네/ 수염이 더부룩이 자랐는데/ 이목을 보니 그래도 알 만하였네/ 너를 그리워한 지 사 오년에/ 꿈에 보면 언제나 아름다웠네/ 장부가 갑자기 앞에서 절을 하니/ 어색하고도 정이 가지 않아/ 안부 형편은 감히 묻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시간을 끌었다네(하략)'

강진에 유배된 지 오년 만에 큰아들 학연을 만났을 때의 소회를 토로한 시이다. 여비가 없어 아버지를 찾지 못했던 아들은 수확이 끝난 마늘을 팔아 나귀 한 마리를 얻어 아버지에게 온다. 입은 옷이 황토범벅인데, 아들이 허리나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하면서도 다산은 아들이 무안해 할까봐 묻지 못한다. 묻지 못한 것은 또 있었다. 아들은 다산에게 "수확한 마늘이 먹는 배만큼 컸다"고 자랑했지만, 농사 초짜인 아들의 말이 곧이들렸을 리 없다. 아들의 말에서 오히려 가난의 크기를 읽었지만 얼마나 힘든지 차마 묻지 못한 아버지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 절절히 느껴진다.

몽매에도 아들을 그리워하였으나 막상 만나서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아버지. 학문의 길에나 삶에나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었지만 자식에게는 유독 약했던 다산. 제대로 자식들을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아버지 다산. 시달리고 후들리면서도 어느 한 곳 기댈 데 없는 우리네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그 모습이 마음 아리게 다가오는 오늘은 어버이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