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과 추상, 설치예술을 넘나드는 임충섭은 틀에 박힌 것을 싫어 하는 듯했다. 그는 캔버스에서 탈옥을 감행하면서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대형 정사각형이 텅 비어 있다. 폐(廢) 컴퓨터에서 나온 부속만 한복판에 꽂혀 있다. 그게 '배꼽'이라고 했다. 부속 밑 파리를 보며 '멋지다'고 아는 체했다. 큐레이터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그건 그냥 날아와 붙은 겁니다."

150호짜리 유화(油畵) 두 점이 있다. 한쪽엔 사각형이, 한쪽엔 탑(塔) 같은 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데 설명이 기막히다. "소실점(消失點)의 열림과 닫힘을 뜻합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배경에 이 수법을…."

프로젝터가 뿜어낸 빛이 투명 아크릴을 비췄다. 여러 모양의 달(月)이 흘러갔다. 한쪽 구석 음향장비에선 맹꽁이 울음소리가 나왔다. 아크릴 속 물에선 금붕어 두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그게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했다.

임충섭(林忠燮·69)은 예술의 문외한(門外漢)을 만난 게 기쁜 모양이었다. "조선시대 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 물에 비친 달을 놓고 논쟁을 했어요. 퇴계는 그것도 달이라고 했고 기대승은 왜 달이냐, 그냥 물일 뿐이라 했지요."

15일까지 서울 학고재에서 전시회를 여는 임충섭은 반구상(半具象)·추상(抽象)·설치미술을 넘나든 세계적인 '가난한 작가'다. 최고의 미술관엔 항상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그를 따라 '추상'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봤다.

월인천강

―구상과 추상은 어떻게 다릅니까.

"구상은 한마디로 '보고 그린다(Looking& Drawing)'는 거지요. 꽃이나 풍경, 모델을 그리는 게 구상입니다. 추상은 '생각한 뒤 그린다(Thinking& Drawing)'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겁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 게 소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란 거지요. "

―언제부터 그런 골치 아픈 세계로 들어간 겁니까.

"고1 때 '일반 구성'이란 수업이 있었어요. 일종의 추상 연습인데요, 사실을 해체하거나 음악을 들은 뒤 내키는 대로 선(線)으로 표현해보거나 지나가면서 물감을 떨어뜨려 보는 겁니다. 사고(思考)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것, 개성을 갖게 만드는 훈련이지요."

―그럼 처음엔 '반구상 반추상'을 하다 추상을 거쳐 설치미술을 한다는 건데 그걸 왜 진화(進化)로 봅니까.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술을 사각 캔버스에만 가둬놓았잖아요. '사각의 정글'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지만 거기서 탈옥(脫獄)하면서 일종의 해탈(解脫)을 느낍니다. 제가 불교에서 좋아하는 단어가 두 가집니다. 깨달을 '각(覺)'과 사물의 본성을 본다는 '견성(見性)'이지요."

―인사를 나눌 때 보니 합장을 하던데, 혹시 불교신잡니까?

"전 불교를 믿진 않아요. 다만 첨단 현대예술에는 불교사상이 깊숙이 박혀있어요. 불교 관련 서적들을 많이 읽긴 했습니다. 전 불교의 핵심이 '각'과 '견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번 개인전의 대표작이라는 '월인천강'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까.

"3년 전에 이화여대 교수가 지은 '한국철학의 맥'이란 책을 우연히 읽었어요. 그때 착안해 작업을 해놓은 겁니다. 이번에 비행기로 옮길 때 애 좀 먹었어요."

―개인전의 주제가 '달(Luna)'이더군요.

"태양, 아니 해님의 여백(餘白)이 뭔지 아세요? 바로 달입니다. 그럼 달의 여백은? 해님이겠지요. 서양의 문화와 문명은 르네상스시대부터 해를 바탕으로 이뤄진 겁니다. 동양은 정반대로 달이 바탕에 있습니다. 저와 달의 인연은 제가 아홉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홉 살?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장티푸스, 그땐 장질부사라고 불린 열병(熱病)이었습니다. 외로움을 심하게 느낄 때였습니다. 고향 어귀에 우물이 있는데 '밤마다 우물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요. 몇번이나 거길 가보려다 겁이 나 못 갔습니다."

―결국 못 가봤나요?

"네 번째 만인가 그 우물에 가 안을 들여다봤어요. 아기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제 얼굴이 비치더군요. 휘영청 밝은 보름달 때문이었지요. 아마 그때의 경험이 의식의 내면에 남아있었을 거예요."

―어릴 적 기억이 그렇게 이어지는 수도 있군요.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일어났어요. 피란온 선생님이 계셨는데 '시골애들은 왜 이를 안 닦고 누렇게 다니냐'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한쪽 도랑엔 녹슨 인민군 탱크에서 녹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바로 옆에선 송사리 뛰노는 자연(自然)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어요. 다른 쪽에선 모래로 이를 닦게 한 뒤 회초리 들고 검사하는 선생님이 계셨고요. 그 삼위일체가 바로 인간의 삶이자 예술 아니겠어요?"

―그런데 '월인천강'안에서 돌아다니는 금붕어도 미국에서 가져온 건가요?

"금붕어는 동대문 시장에서 한 마리에 500원씩 주고 사온 겁니다. 한국물이 미국보단 좋은 것 같아요. 미국에선 사흘이면 죽었는데 여기선 열흘 동안 살아있는 걸 보니."

―전시 도중 금붕어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금붕어를 안에 넣어두는 건 사실 죄짓는 거지요. 불교에서도 살생(殺生)을 금하는데. 금붕어가 죽을 걸 대비해 부부 금붕어를 저쪽 어디에 있는 어항에 놔뒀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임충섭은 8년 동안 중고교에서 미술교사를 하다 미국유학 길에 올랐다. 1973년의 일이다. 아내와 큰딸만 남겨놓고 훌쩍 비행기에 오른 그의 지갑에는 800달러가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 액수냐고 묻자 "한 달 생활비쯤 된다"고 했다.

미국에서 그가 잡은 집은 월세가 50달러로 최하층이 사는 집이었다. 지하철이 위로 지나가면서 5분에 한 번씩 세상이 망할 때 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그는 대학에 다니고 작품 활동을 했으며 허드렛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무슨 일을 했습니까.

"처음엔 접시닦이를 했어요. 부두에서 노동도 해봤어요. 부두 그러면 사람들은 엄청난 중장비나 갱들을 연상하는데 그런 건 아니고 동양에서 온 식료품이나 건축자재를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이삿짐도 날라봤고 디자인도 해봤고요."

―어느 기사에서 보니 액자도 만들었다면서요.

"한 유대인이 하는 액자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너 미술 한다면서? 잘하겠네'하고 맡겨주더군요. 한 달 정도 배운 뒤부터 만들기 시작했지요. 액자 만드는 게 신경쓰이는 일이 많고 고통스럽습니다. "

―그런 파트타임 일을 몇살 때까지 했나요.

"오십까지 했어요."

―한국에 있었으면 교사로 생활도 안정되고 존경도 받았을 텐데, 후회는 되지 않았습니까.

"돌아갈 마음이 반, 남고 싶다는 생각이 반쯤 됐어요. 나중에 뉴욕대에서 석사를 했지만 처음 다닌 학교가 브루클린 뮤지엄 아트스쿨입니다. 그 학교에서 처음 받은 평가가 '굉장히 동양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틀에 박힌 작업을 하는 것 같다, 오픈된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어요."

―우울했겠습니다.

"정반대였어요. '아! 내가 서울에서 받은 미술교육이 부족한 것이었구나.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생활을 7년쯤 하다 처음 인정을 받았지요.

"미국에 가서도 반 추상을 하다 2년 만에 추상, 아니 비구상(非具象)이란 말이 옳겠다, 그쪽으로 옮아갔지요. 다시 3~4년 후에 미니멀아트 쪽으로 갔다가 설치미술로 갔고요. 첫 인정은 퀸스뮤지엄에서 매년 여는 현대미술심사였어요."

―경쟁률이 셌습니까?

"800명이 응모해 14명을 선발하는데 거기 뽑힌 겁니다. 닥터 로버트 핀커스위든이라는 분이 제 단칸방에 와 작품을 보더니 '아주 바람직한 현대미술을 하고 있다, 동양미술은 기러기나 돛단배만 그리는 줄만 알았는데 이런 첨단미술을 하는 동양인은 네가 처음이다'라는 평가를 내려준 거지요. 그게 1979년입니다."

―그때 고 백남준을 처음 봤다면서요.

"백 선생이 랜드 브로크 갤러리에서 조셉 보이스라는 독일작가와 함께 전시회를 하고 있었어요. 백 선생의 작품은 부처님이 비디오를 보는 것이었고 조셉은 백묵으로 칠판에 그림을 그려놓았지요. 신선한 충격을 그때 받았어요."

―백남준의 뒤를 잇는 설치예술가라는 평가도 있던데.

"전 평론가들과 기자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은 작가를 어느 파(派)다 하는 식으로 유형화시키려 하더군요. 기자들은 '왜 당신은 미국에 그리 오래 있으면서 동양적인 틀을 못 벗어나느냐'고 하는데 그럼 햄버거 1만개 먹었다고 미국인이 된다는 소립니까? "

―두 번째 인정받은 게 OK해리스 갤러리였다면서요.

"미국 친구가 '네 작품을 소호에 가서 보여주라'고 하더군요. 실험적인 그림을 들고갔는데 그곳이 바로 OK해리스 갤러리였어요. 그 갤러리의 아트딜러가 제 그림을 보더니 대뜸 '내년 5월에 개인전을 해주겠다'고 말하더군요. 그 인연으로 뉴욕타임스 리뷰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뉴욕타임스 리뷰가 매주 한 번 나오면 1년에 오십 번은 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리 대단한가요.

"금요판의 리뷰는 전문성과 원숙성을 보장받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매주 나오지만 미국의 미술인구가 많으니까요."

콘크리트의 여백

임충섭이 초등학교 1학년 때 6학년 형이 담임교사의 초상화를 그려왔다. 소년의 눈에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림에 푹 빠져들었지만 농사를 하다 미곡상으로 발을 넓힌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해했다.

어느 날 서울에 쌀 팔러 간 아버지가 예술에 개안(開眼)하고 내려왔다. 무심코 만난 친구와 수인사(修人事)를 나누던 중 임충섭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아버진 '환쟁이가 돼 무엇 하려고…'라고 했는데 친구의 한마디가 나온 것이다.

―그분이 뭐라고 했기에요.

"그때 서울예고가 생긴 지 3년쯤 됐을 때입니다. 친구 분 말씀을 듣고 입학원서를 사오신 거예요. 경쟁률이 8대1이었습니다. 전 시험장에서 이젤을 처음 봤을 정도였어요. 꼭 지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붙었지요."

―서울예고에서 같이 공부한 분 중에 유명인사가 있습니까.

"바이올린 하는 김민이라고, 나중에 서울음대 학장을 지냈고 바로크합주단 창립자입니다.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도 했고요. 미술은 얘기하기 곤란한데…."

―서울미대에 진학한 걸 보면 실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어시험 문제가 '나일강의 홍수'라는 글을 시험지 반 페이지 정도에 번역하는 것인데 꽤 잘 봤어요. 시험 몇달 전 본 참고서에 본 글이었거든요."

―미술 하면 서울대와 함께 홍익대도 유명하죠?

"두 학교의 이야긴 전 세계에서도 알아요. 한번은 프랑스에 가니 '당신 서울대 나왔냐 홍대 나왔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뭐랄까, 미학에 이견(異見)이 있다는 정도로만 말하겠습니다."

―서양화를 전공으로 택한 이유는 뭡니까.

"동양화보다는 서양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고 봐야지요. 그렇지만 동양화를 배제한 건 아니에요."

―고교부터 서울에 왔으면 자취와 하숙을 꽤 했겠습니다.

"제 인생을 보면 그래요. 고향 충북 진천의 자연을 떠나 예고에서 다시 서울대로, 거기서 뉴욕의 콘크리트 숲으로 가게 됐어요. 전 개념미술이니 미니멀아트니 이런 걸 의식하고 작업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콘크리트 정글 속에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그게 바로 현대문명과 자연을 잇는 여백이 되는 거지요."

―대학 졸업 후에 미술교사가 됐는데….

"서울 미대 출신 중에 응용미술 한 친구들 빼고는 대개 교직을 택했지요. 가르치는 게 배우는 거라고 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됐습니다."

―미술학도면 작품을 팔아 학비에 보탤 수도 있지요.

"제가 학생일 때는 그림을 팔 수 없었어요. 기껏해야 남에게 선물하는 정도지요. 전 작품을 할 때 실패했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습니다. 다 모아놨다가 몇년 후 다시 꺼내보지요. '당시 내 아이디어가 어땠고 그걸 제대로 표현했는가'하고 살펴보는 겁니다. 그런데 제 젊었을 때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국전 경력도 없던데.

"전 국전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제도화된 것은 싫어합니다. 서울대 미대 그룹전인 '앙가주망'에는 출품했지만요."

재벌가의 부인들

―작품값이 꽤 비싸다고 들었는데.

"블루칩 작가들에 비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재료비 드는 정도 받으니까요."

―재료비라뇨? 아까 보니 텅 빈 캔버스에 고물 컴퓨터에서 뽑아놓은 부속 하나 들어간 거며 저 작품에 들어간 저 부속은 길거리 쓰레기통에서 주운 거라면서요?

"미술이란 건 과거에 형편없는 가격이었어도 하루아침에 폭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잘 팔리는 걸 기대 안 하는 게 마음이 편하지요. 차라리 작품에 매진하는 게 더 행복하기도 하고요."

―그럼 왜 삼성의 ○, 신세계의 ○, 전 대우그룹의 ○씨 같은 부인네들이 선생 작품을 소장한단 말인가요.

"삼성은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 게 계기가 됐고요, 신세계는 컬렉션이 있으니까요. 대우 같은 경우는 소품을 구입한 정도예요."

―고 백남준도 임 선생 작품을 샀다면서요.

"'오브젝트 언타이틀드(Object Untitled)'라고, 제 작품이 걸린 곳은 꽤 있어요. 워싱턴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부속된 허쉬혼 조각 뮤지엄에 6점이 걸려 있어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도 3~4점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블루칩 작가들만큼은 아니라니까요. 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에도 3점이 있다. 근데 그 작품 제목이 '물집'인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뭡니까, 그게.

"2001년에 9·11사태가 일어졌잖아요. 제 작업실이 월드트레이드센터와 다섯 블록 떨어져 있는데 누군가 '빨리 밖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밖에 나와 보니 100층 건물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오고 있었어요. 전 그게 영화 촬영하는 걸로만 알았어요. 와, 그런데 다시 비행기가 날아와 건물에 박히는 거예요. 그러면서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꼭 제 작업실을 덮칠 것만 같았어요."

임충섭은“첨단현대예술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임충섭의 작품‘각(覺)’. 이태경 기자

―덮쳤나요?

"나중에 건축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니 요즘 건축물은 주저앉도록 설계됐지 전봇대 쓰러지듯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때 하고 있던 작품 제목도 '물집'이었어요. 거 있잖아요, 손에 잡히는 물집."

―예술하면 스트레스가 심하지요, 혹시 술·담배로 풉니까.

"한번은 제가 우울증에도 걸린 적도 있어요. 문 기자께 꼭 권하고 싶은 게 요가예요. 그걸로 우울증을 이겨냈거든요. 원래 제가 '술대장'입니다. 서울대 다닐 때는 사흘 동안 내리 술만 마신 적도 있어요. 담배는 10년 전에 끊었습니다."

학고재 갤러리 두 건물의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진행한 인터뷰 때문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임충섭은 "고생했는데 커피나 한잔 대접하겠다"고 손을 잡아끌었다.

"문화부 경험 없는 기자랑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네. 처음엔 무서운 줄 알았는데 문 기자, 재미있는 사람이야." 임충섭은 카푸치노에 설탕을 3개나 뜯어넣어 '설탕물'을 해 마시는 것이었다. "피곤해서 그래요. 이렇게 먹으면 확 풀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