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간산 간인간세(看水看山 看人看世)'.

지리산을 12번이나 올랐던 조선중기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58세 때 쓴 유람기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물도 보고 산도 보고 사람도 보고 세상도 보았다"고 적었다. "참된 문화유산 답사는 자연을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인(先人)들의 자취와 그들이 살았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란 뜻"이라고 탐방단의 첫째날 초빙강사인 최석기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가 풀었다.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주최하고 문학사랑·한국도서관협회·대산문화재단·한국연극협회가 후원하는 '길 위의 인문학' 네 번째 탐방인 '지리산의 종소리, 남명을 듣다'가 23~24일 경남 산청과 합천 지역의 남명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첫째날은 도구대~입덕문~탁영대~산천재~남명묘소~백운동계곡~단속사지~덕천서원, 둘째날은 배산서원~뇌룡정~함벽루~황계폭포로 이어진 탐방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산청도서관을 통해 합류한 지역 참가자 등 91명이 참여했다.

탐방단은 남명의 말처럼 물과 산도 보고, 사람과 세상도 보았다. 남명이 세 차례 올랐던 백운동 계곡을 따라 30여분 산행(山行)하자 흰 바위들 틈을 돌아 힘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19세기 말 유림(儒林)들은 계곡 큰 바위에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d之所)'라는 글자를 새겼다. '남명 선생이 지팡이 짚고 신발을 끌며 왔던 곳'이란 뜻이다. 남명 사후 300년이 지나 각자(刻字)한 까닭은 무엇일까.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올곧았던 남명 선생이 그리워진 것"이라는 최 교수의 설명에 탐방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물은 아득하여 앎이 없다네. 뜬구름 같은 일 배우려해도, 높은 풍취가 깨어버리네.’남명 조식이 시를 남긴 경남 합천 함벽루에서‘길 위의 인문학’탐방단이 정우락 경북대 교수(왼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남명이 추구한 도학(道學)이란 '길[道]'을 찾아가는 '배움[學]'일 것이다. '길 위의 인문학' 탐방단도 배우면서 길을 걸었다. 이지연(21·동덕여대 3학년)씨는 "남명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는데 교수님 설명을 들으면서 알게 되어 좋았다"고 말했다. 오예환(69)씨는 "전에는 친구·가족들과 놀러다니며 그저 '경치가 좋구나'하고 생각했다"며 "이제부터라도 우리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자식들에게도 권해야겠다"고 말했다.

남명묘소에 이르자 탐방단은 신발을 벗고 "배(拜)~" 하면 절하고 "흥(興)~" 하면 일어나는 전통 방식대로 두 차례 절을 올리며 참배했다. 남명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 경의당(敬義堂) 마루에 올라 남명 사상의 핵심인 '경(敬)'과 '의(義)'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최 교수는 "남명은 '안으로 밝히는 경[內明者敬]'과 '밖으로 끊어 자르는 의[外斷者義]'를 자기 철학의 브랜드로 했다"며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조심하게 되듯이 언제나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음가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둘째날 가장 먼저 찾은 배산서원은 영남 유학의 쌍벽(雙璧)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동시에 배향하고 있는 유일한 서원이다. '배산서당(培山書堂)'이라는 현판은 근대중국의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가 썼다. 19세기 말 공자교 운동을 펼친 지역 유림들이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를 세우면서 퇴계와 남명을 동방유학의 성인(聖人)으로 추숭했고, 퇴계를 '이자(李子)'로, 남명을 '조자(曺子)'로 높인 위패를 모셨다. 둘째날 초빙강사 정우락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는 "퇴계가 봄동산의 꽃향기를 맡듯 따뜻한 논리로 가르쳐 주시는 분이라면, 남명은 바위로 이뤄진 설산(雪山)처럼 범접할 수 없는 강한 기개를 가진 분"이라고 설명했다.

탐방단은 남명과 퇴계가 모두 시를 지었던 합천 함벽루에 올라 황강(黃江)의 물줄기를 굽어보며 누각에 걸려 있는 남명의 한시를 읊었다. 정 교수가 유장한 목소리로 가락을 붙여 한 구절씩 읊으면 따라 읽는 방식으로 남명의 시심(詩心)에 흠뻑 젖었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