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윤 아나운서

2009년 7월 31일, 3년 4개월의 군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역신고를 마친 뒤, 전투복 차림으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야구장이었다. 전투복을 입고 목동구장을 바라봤다. ‘이제 나의 생활 무대는 더이상 '연병장'이 아닌 '야구장'이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사회라는 곳은, 스포츠 판이라는 곳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전역한지 3일 뒤, 첫 인터뷰를 하기위해 야구장 덕아웃에 섰다. 덕아웃에서 내다본 그라운드는 아름다웠다. 관중석엔 야구팬들의 함성소리가 가득했다. 그들의 표정, 몸짓 그리고 그 공기에서 느껴지는 해방감.

하지만 내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첫 인터뷰에 대한 두려움, 야구에 대한 두려움, 눈 앞에 마주친 거구의 야구선수들에 대한 두려움까지. 너무도 많은 두려움이 밀려 들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조금의 여유조차 내겐 없었다.

두려움을 떨치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마음 속으로 선수들에게 유니폼 대신 군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두려움으로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첫 인터뷰는 시작됐다.

첫 인터뷰 상대는 지금은 두산베어스로 옮긴 히어로즈의 이현승 선수. 그 날 경기의 선발투수였다. 그라운드에 발을 딛고 이현승 선수와 마주했다. 재빨리 마음 속으로 선수에게 전투복을 입혔다. 그러는 사이에 중계석에서 나를 부른다.

“오늘의 선수는 히어로즈의 이현승 선숩니다. 이지윤 아나운서가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이지윤 아나운서!”

짐짓 자신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중계석의 멘트를 이어받았다.

“히어로즈 선발투수 이현승 선수와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출발은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승 추가해서 오늘로 시즌 11승을 올리셨네요. 다승왕 욕심이 날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머뭇거리던 이현승 선수의 대답,

“저 오늘 승리투수 아닌데요.”

앗, 이기면 승리투수가 아니었던가? 새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첫 인터뷰를 마쳤다. 2009년 여름, ‘짬밥 높은’ 중위였던 나는 하루 아침에 ‘이등병’ 아나운서가 되어 야구장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군대만 다녀오면 ‘특급 여전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란 전쟁터에서 절대 승자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회라는 곳은, 스포츠 판이라는 곳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은 야구경기가 끝나면 승리팀의 선수와 감독을 인터뷰하는 일이다. 아무도 질문할 거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나운서 스스로 경기를 지켜보고, 분석하고, 정리해야 한다. 야구에 대한 기본지식도,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눈도 부족했던 나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연장전까지 박빙(薄氷)의 승부가 펼쳐지는 날은 ‘혼수상태’ 직전까지 간다. 어느 팀이 승리할지, 어느 선수를 인터뷰하게 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인터뷰에서처럼 승리투수 요건을 헷갈려서 걸핏하면 내 마음대로 투수들의 승수를 쌓아주기도 했다.

‘낫아웃’ ‘보크(balk)’같은 생소한 룰까지 모두 익히는데 꼬박 5개월이 걸렸다. 각 팀의 주전선수들의 얼굴을 익히는데는 7개월이 걸렸다. 항상 야구 가이드북을 손에 들고 다니며 들춰봤던 덕분이다.

온갖 질타와 야유, 응원과 격려 속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육군 중위' 대신 '아나운서'라는 수식어를 이름 앞에 붙인지 이제 8개월. 이제서야 '군대냄새'가 빠졌다는 소리를 조금씩 듣기 시작한다. 야구의 재미가 무엇인지도 이제 알 것 같다. 승리투수의 요건도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그리고 2010 프로야구가 시작됐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두려움이 앞선다. 마치 야구장이란 전쟁터로 뛰어드는 ‘여전사(女戰士)’의 심정이다. 올해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이제는 사람들에게, 또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프로야구의 새 시즌이 시작되면서 나의 두려움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덕아웃에 발을 들였다. 덕아웃에서 내다보는 푸른 그라운드는 여전히 눈부시다.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와 에너지를 느끼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선수들에게 군복을 입혀본다.

2010 프로야구 최고의 인터뷰를 꿈꾸며.

◆ 이지윤 아나운서는 누구?

'유일무이'한 여군(女軍) 출신 아나운서. 1982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알고 싶어서" 과감하게 여군 입대원서를 냈다. 2006년 육군 소위로 임관(여군51기)해 육군 8사단 신병교육대대 정훈장교를 거쳐 국방홍보지원대 중대장 및 앵커로 복무했다. 2009년 7월, 40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뒤, 케이블채널 KBS N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