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작곡가 박춘석 선생이 얼마 전 타계했다. 선생은 한국 영화음악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한다. 특히 1960년대는 선생의 독무대였다. 영화를 위해 음악을 만드는지, 음악을 등에 업고 영화를 만드는지 알 수 없을 정도 영향력이 막강했다.
'유랑극장'(1963)은 영화도 영화지만 안다성의 노래가 대히트했다. 영화 속에서는 박노식이 노래를 불렀다. '비 나리는 호남선'(1963)의 주제가는 손인호 노래였다. 원래 1956년 발표한 히트곡이었는데 노래의 인기를 후광삼아 만든 영화다. 가사가 목에 메인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나리는 호남선에/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노래 '비 나리는 호남선'은 가사 때문에 자유당의 미움을 받았다. 1956년 5월 5일 새벽 5시경,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민주당 대선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은 호남선에 몸을 실었다. 익산으로 유세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해공은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다.(암살설도 있다.) 대중은 '비 나리는 호남선'을 해공의 추모곡, 사모곡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음반이 날개돋친듯 팔려 나갔고, 노래는 저항가로 진화하고 있었다. 자유당은 이 노래가 신경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남과 북'(1964)도 빼놓을 수 없다. 곽순옥의 애절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이산가족의 가슴을 적시고 또 적셨다. 이 노래는 1983년 남북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또한번 전국민의 노래가 됐다. 선생은 1966년 '초우'(패티 김 노래), '초연'(1966, 최양숙 노래) 등의 영화에 음악을 제공한다. 영화 '초연'은 주제가보다 삽입곡 '호반에서 만난 사람'을 대히트시키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67년 선생의 활동은 가히 절정에 이른다. 그 한해 선생은 '향수', '가슴 아프게', '내몫까지 살아주', '그리움은 가슴마다', '섬마을 선생님' 등의 영화에 음악을 선물한다. 또한 이 영화와 주제가는 별별 화제를 다 남긴다. '가슴 아프게'를 부르기 위해 남진은 오아시스에서 지구로 이적을 감행한다.
같은 해 선보인 '그리움은 가슴마다'는 선생의 개인사를 담고 있다. 이 곡 발표 직전 선생의 모친께서 별세하신 것이다. 선생이 어머니를 그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영화도 노래도 대히트를 기록했다. '섬마을 선생님' 역시 영화와 노래 모두 공전의 히트를 날렸다. 그러나 노래는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다.
1968년도 영화음악계는 선생의 독무대였다. '낙조', '별아 내 가슴아',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부르스', '파란 이별의 글씨', '지금 그 사람은' 등의 영화들이 선생의 음악에 빚을 진 작품들이다. 노래 '별아 내 가슴아'는 1958년작을 남진이 리메이크한 노래로 한동안 금지곡 목록에 오른다. '지금 그 사람은'은 당시 이례적으로 일본 올 로케이션으로 만든 영화였다.
선생은 마침내 영화에도 출연한다. 영화 밖에 있다가 영화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음 기사는 당시의 모습을 스케치한 기사다. '영화배우 박춘석'의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심프로덕션(대표 신태선)서 제작중인 극영화 '속 이별'에 주연을 맡아 실명 그대로 출연중인 가수 패티김이 작품의 출연이 끝나면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말해 화제가 돼있다. 패티김의 데뷔작이자 은퇴작이 될 이 영화는 당초 '그리고 둘이는 그리고 둘이는'이라는 제명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으나 '속 이별'로 개제되었으며 그녀의 딸 정아양과 작곡가 박춘석씨도 실명 그대로 특별 출연하고 있고 개런티도 우리 영화사상 최고인 200만원을 받았다고 해서 영화가를 놀라게 했었다." (1974. 6. 1)
< 이승호ㆍ'옛날 신문을 읽었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