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은 갑부(甲富)였다. 일제 때 '쌀 7000석꾼'으로 불렸고 서울 종로구 익선동 집엔 오경석·장택상 같은 당대 유명 인사들이 사랑방을 드나들었다. 지금 유명한 요정이 된 '오진암'자리다.

대한제국, 일제, 대한민국으로 역사가 바뀌며 집안은 몰락했다. 자유당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잃었고 그 대가로 받은 지가(地價)증권은 6·25 때 치솟던 인플레이션으로 휴짓조각으로 변했다.

그런 그의 집안을 지탱해 준 것은 국보들이었다. 승(僧) 일연의 삼국유사(국보 306호), 이승휴의 제왕운기(보물 418호), 청동(靑銅)은입사향로(보물 288호)는 할아버지 이병직(李秉直)이 평생 사 모은 것들이었다.

할아버지는 1973년 여름 77세로 세상을 뜨면서 "형편이 어렵거든 팔아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전셋집을 전전하고 생활고에 시달릴 때 거액을 줄 테니 팔라는 사람도 나타났지만 그럴 순 없었다.

결국 그는 불가에 귀의해 스님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곽영대(郭英大·66)이다. 그에겐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17대째 내려오는 내시 집안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1945년 두 살 때 불의의 사고로 '사내'를 잃었다. 그래서 내시 집안에 이성손자(異姓孫子·혈연관계가 없어 성이 다른 양자)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 땅의 마지막 내시 후손이 삼국유사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도혜 스님은 할아버지가 모은 조선시대 서화 ‘이조(二鳥)화면도’를 보여줬다. 마음속 자부심과 담대함 역시 국보처럼 변치 않고 남아 있다.

◆400여년 내려온 내시 집안이 부자가 된 사연

곽영대의 조상은 선조 때 내시 김계한이다. 김계한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의주까지 피란 간 공로로 '연양군'이란 칭호를 얻었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대대로 내시 집안이 됐어요. 김계한 할아버지는 양자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작은아들이 우리 선조예요. 양자에서 또 양자로 그렇게 400년을 이어왔지요."

그의 6대조 내시 이민화는 황해도에서 유재현을 양자로 데려왔다. 그 마을에 고기잡이와 간척사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고을 원님이 재산을 탐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며 무조건 죽이겠다며 덤볐다고 한다.

부자는 유재현 가족을 찾아와 "임금께 알려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이 소식은 이민화를 통해 고종에게 전해졌다. "죽음을 면한 부자가 고맙다며 내놓은 300석 논으로 서울 전농동에 땅을 샀대요."

이를 바탕으로 경기 양주 일대 등에 땅을 사면서 재산이 늘기 시작했다. 수락산 인근에 '우우당(友于堂)'이란 별장과 땅도 소유했는데 대원군에게 받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덕성여대 소유다.

"이민화 할아버지는 대원군, 유재현 할아버지는 명성왕후와 가까웠대요. 둘의 다툼이 생기면서 부자간인데도 서로 3년간 말도 못 하고 지냈다고 해요." 유재현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에게 '사대당파'로 몰려 죽었다.

◆7000석 부자인 내시 화가 이병직

그의 할아버지 이병직은 일제 때 내시 화가로 유명했다. 1903년 7살 때 사고로 '사내'를 잃은 뒤 강원도 홍천에서 7000석꾼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왔다. 그는 나중에 '통훈대부'란 칭호를 받았다.

내시제가 폐지된 후 그는 19살 때 당대의 유명한 서화가인 김규진의 서화연구소에서 그림과 서예를 배웠다. 난과 대나무를 잘 그렸고 1950년대 후반엔 국전 서예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에겐 평생 '내시 화가'란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어느 한 모임에서 이병직이 화선지에 난초와 매화를 그리자 뒤를 이어 이용우 화백이 괴상한 춘화(春畵)를 그렸다. 그러곤 이병직에게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껄껄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웃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사이 이병직은 그대로 방을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병직은 누구도 무시 못할 7000석꾼의 부자였다. 자기 땅 절반을 의정부중학교를 세우는 데 내주었다.

선산이 있는 경기도 양주 광적면 효천리엔 초등학교를 지었다. 그의 집에는 국보급 책과 그림들이 즐비했다. "할아버지는 옛 책과 고서화, 불상 등을 많이 샀는데 더 귀중한 물품을 사기 위해 몇번씩 사고팔기를 했어요."

1930년대엔 경성미술구락부에 그가 소유한 유물만 429점이 경매에 나왔을 정도다. 그의 집 벽장 궤짝 안에 유물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낙랑청동다상(樂浪靑銅茶床)은 일본인이 수십 차례 찾아와 사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우리 다문화(茶文化)의 유래를 증명하는 유물이어서 일본에 팔려나가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추사의 글씨며 고려청자 등 그의 손을 거친 국보급 유물이 상당했다. 곽씨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늘 단아했다.

◆북한에 갈 뻔하다 되찾은 삼국유사

이병직이 가장 애지중지한 유물은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평양의 숭실전문대 교수 이인영이 갖고 있던 책이었다. 그가 해방 후 서울로 와 생활이 어려워지자 1948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내놓았다. 거금 75만원을 주고 샀다. 오진암을 6만원에 팔았으니 기와집 수십채를 살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병직은 1950년 6월 이 책을 다시 경매에 내놓았다. "당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리가 나오는 등 정세가 불안했어요. 그래서 현금을 마련하려 했대요."

책값을 미처 받기도 전에 6·25가 터졌다. 책은 경성미술구락부 금고 속에 보관된 상태였다. 북한군들은 이 금고를 비롯해 서울 각처에서 모아온 문화재들을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삼국유사는 경복궁 마당에서 뒹굴었다고 한다. 당시 박물관에 근무했던 이홍직 고려대교수가 이를 발견해 이듬해 봄 부산에서 이씨에게 돌려주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책이 돌아온 것이었다.

"겉표지에 아무 제목도 없었어요. 북한군들이 책의 가치를 몰라 던져버린 것 같아요." '기적'같은 일이었다. 이병직 소장품 중에는 북한 조선미술박물관 전시품도 있다. 이병직 안방에 걸렸던 김두량의 유명한 소몰이꾼과 김홍도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스님이 된 마지막 내시 후손

곽영대는 고향이 경기도 파주로 본래 전주 이씨였다. 그러다 양자로 들어와 성을 바꿨다. 그의 아버지(곽우규)는 자기 처지를 한탄하다가 숨졌다. 그는 할아버지 시중을 드느라 직업다운 직업을 잡아본 적도 없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삼국유사가 1965년 보물로 지정되자 무척 서운해 했다고 한다. 세상이 왜 삼국유사 가치를 몰라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국보 지정 청원을 냈고 11년 만인 2002년 국보로 지정됐다.

국보 309개 중 이처럼 개인이 소장한 것이 전체의 27%, 89개라고 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삼국유사를 여러 번 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일연 스님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준 국사(國師) 자리를 초연히 버리고 단군신화를 알려 민족정기를 되살린 그였다. 그래서 1996년 곽영대는 도혜(度慧)란 법명을 받았다. 그는 요즘 인사동의 다화실(茶��室)에서 수도 중이다.

할아버지가 즐기던 다문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염불로 극락세계에 인도하는 영가천도(靈駕薦度)도 그의 주요 업무다. "우리 집안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내시 집안이에요. 돌아가신 분들을 평안하게 하는 게 제 숙명인지 몰라요."

그도 속가(俗家)에서 아들을 양자로 얻었다. "삼국유사는 단군신화 등 우리 민족의 영혼이 깃든 보물이에요.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손에게 가보로 물려주며 일연 스님의 정신을 이어가려 합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