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과 같이 순수 미술과 생활 미술, 공예의 구별이 없었던 고대 그리스에서 조각가들은 아름다운 신과 인간의 조각뿐 아니라 분수 조각, 방패, 가구 등도 제작했다. 특히 수요가 많았던 것은 무덤 앞에 세우는 기념상이나 묘비였다. 물론 묘비 조각은 대부분 이름 없는 평범한 조각가들의 차지였지만 아테네의 묘비는 그리스 전역에 수출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주로 좁고 높은 수직적인 돌에 죽은 사람의 모습만을 부조로 새기던 묘비는 점점 옆으로 넓어져 네모난 형태에 여러 사람을 함께 조각하게 되었다.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인 기원전 약 410~400년에 제작된 '헤게소 비'는 아테네 시외에 있는 디필론 묘지에서 1870년에 발견되었다. 윗부분에는 프록세나스의 헤게소라고 씌어 있어 묘비의 주인공 헤게소가 프록세나스의 부인이나 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박공과 양쪽에 기둥이 있는 이 묘비는 마치 실내 공간같이 연출되었는데 헤게소는 의자에 앉아 하녀가 들고 있는 보석상자에서 자신이 생전에 사용하던 목걸이를 꺼내 보고 있다. 중앙에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생전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두 여인은 엄숙하고 절제되면서도 우수에 싸인 분위기를 준다.

헤게소 비는 두 여인의 시선이 목걸이에서 만나는데 이 부분이 전체 구성의 중심이다. 보석상자로 이어지는 팔들과 휘어진 의자의 조화로운 형태는 조각가의 탁월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부드럽고 얇은 옷은 마치 젖은 것처럼 몸에 들러붙어 여성의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늘어지고 겹쳐지면서 깊이감을 주는 옷 주름 처리의 섬세함과 투명함은 그리스 전성기 조각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 묘비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은 찾을 수 없다. 고대 이집트나 기독교 미술에 죽은 후 심판받는 모습이나 천국 또는 지옥의 장면들이 많이 나타나는 데 비해, 그리스 미술에는 이러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