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는 카스트보다 더 지독하다는 새로운 신분 제도가 있다. 영어 격차(English divide)다. 영어를 구사하는 1억명과 못하는 10억명이 직업과 경제적 지위에서 극명하게 엇갈린다. 우리도 영어 격차가 신분을 결정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문제는 영어격차가 본인 능력보다 부모의 경제력 등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2010년 우리 사회 영어 격차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공교육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추적했다.

경북 ○○군(郡) 소재 A고 2학년 김모(17)양은 교내 영어 퀸(queen)이다. 해외엔 나가본 적도 없지만 중학교 때부터 문고판 영어소설을 읽고, EBS 회화 강좌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교내 영어 시험만 봤다 하면 항상 만점이었고, 수능 모의고사에서도 한두 문제 빼고 모두 맞았다. A고 영어 교사는 "서울 강남에서도 이 정도면 반에서 5등 안엔 들 것"이라고 자랑했다.

과연 그럴까. 취재팀은 김양이 다니는 A고와 서울 강남 B고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의평가를 실시했다. 토피아어학원의 도움을 받아, 텝스(TEPS)와 토플(TOEFL) 문제 유형으로 구성된 '실용영어능력 평가시험'을 치르게 했다.

결과는 극명한 영어격차(English divide)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양은 총점 200점 만점에 105.5점(iBT토플 환산 70점)을 받았다. A고에선 단연 1등이었다. 하지만 서울 B고와 비교하니, 한 반 45명 중 18등에 머물렀다.

A고의 지난해 3학년 수능 영어 성적은 강남 B고와 엇비슷했지만, 취업이나 유학 등에 필요한 실용영어 시험에선 현저한 격차를 보인 것이다. 교실에서 이미 영어격차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 중이었다.

서울 강남 청담어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이 해외 유명대학을 졸업한 원어민 강사로부터 토론식 영어 수업을 받고있다.

◆실용영어 실력 크게 벌어져

영어 외의 모든 과목에서 두 학교의 실력차가 날까. 취재팀이 2009학년 수능 성적 원자료를 분석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언어영역(국어) 점수는 오히려 경북 A고 재학생 평균이 강남 B고 평균보다 0.8점 높았다. 외국어영역(영어)과 수리나영역(수학)은 B고가 앞섰지만 그 차이는 6.7점, 3.7점에 불과했다(표준점수 기준).

하지만 ‘실용 영어’ 시험에서는 B고의 격차가 압도적으로 컸다. 토피아 학원 시험에서 독해평가 부문은 평균 12점(100점 만점) 차이가 났고, 듣기평가에서는 16점 차이가 났다. 특히 상위권(30%) 학생들은 듣기평가에서 23.5점(100점 만점), 독해평가는 21.8점 차이가 나 격차가 더 컸다.

문제 유형별로 분석해보니, 교과서 유형 문항보다 실용영어 중심의 문항에서 차이가 컸다. 교과서 중심의 수능독해 문항에 대한 응답률 차이는 0.6점에 불과했지만, 토플형 독해문제와 텝스형 독해문제에서는 각각 24.1점과 15.1점(이상 100점 만점 환산 기준)으로 벌어진 것이다.

김석환 토피아어학원 대표는 “수능에서 나타나지 않는 ‘진짜 영어’ 실력 격차가 이번 시험에서 드러났다”며 “외국생활을 경험해 봤는지, 원어민으로부터 영어를 배워 봤는지 등 환경과 기회의 차이가 영어 격차를 만들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남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과교사가 아닌 일반 교사가 교육청이 보내준 '방과 후 학교'용 영어 교재를 출력해 가르치고 있다. 이 학교 교사들은 영어교육에 공을 들이고는 있었지만, 학부모들은 원어민교사, 영어전문강사 파견 등 국가차원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

◆경제력이 영어 실력을 가른다

심화되는 영어격차의 첫째 원인은 초·중학교 시기의 사교육 격차 때문이다. 강남 B고 학생들은 한 반에 10명 이상이 어학연수 경험이 있고, 90% 이상이 원어민 강사가 가르치는 영어전문학원에 다녔었다. 반면 경북 A고 학생들은 학교 밖에서 원어민 영어강사에게 배운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농(都農)간 격차만은 아니었다. 취재 중 만난 서울지역 영어 교사들은 모두 “같은 학교 안에서도 경제력에 의한 영어 격차가 크다”고 지적했다.

서울 강남 C초등학교에서는 2년 전 ‘영어 왕따’ 사건이 발생했다고 이 학교 교사들이 전했다. 영어유치원을 나와 영어전문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 아이 한 명에게 “Are you crazy?(너 미쳤지?)” “You are ugly, aren’t you?(너 못생겼다, 그치?)와 같은 질문을 던져 놓고,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자 “○○는 미치고 못생겼대요”라며 며칠 동안 놀린 것이다. 이 학교 교사는 “예전에는 옷차림이나 외모로 가난한 아이들이 ‘왕따’가 되곤 했는데, 요즘엔 고액 영어유치원 다닌 아이들이 영어로 ‘왕따’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학부모들도 큰돈 들여가며 고액의 영어유치원이나 영어학원으로 향한다. 지난해 서울의 한 사립초등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킨 박모(39)씨는 “아이가 좀 부진한 것 같다”는 담임교사의 전화를 받고는 결국 영어전문학원에 보냈다. 150만원에 이르는 수업료가 부담됐지만, 같은 반 아이들이 기초적인 회화까지 구사하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지난해 수도권 서부·북부, 서울 강서·강남·분당의 5개 초등학교 학생 238명을 대상으로 영어 사교육 경험을 조사한 결과, 영어유치원(강남 25%, 비강남 1%) 및 영어전문학원(77%, 40%), 해외연수(40%, 22%) 등 전 부문에서 지역별 양극화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전무교(無錢無敎)' 영국 공교육, 과연 남의 일?
사교육 없는 그날, 언젠가는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