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밴쿠버의 숙소에서 TV를 틀자 진행자가 말했다.

"캐나다에서도 '유나킴'은 많이 알려져 있죠. 유나킴은 토론토에서 훈련해왔어요. 지금 경기장 전광판에는 '김연아(Kim Yu-Na)'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유나킴'이라고 부르는 것은…."

피겨 쇼트프로그램 시합을 앞두고 있었다. 동계올림픽을 독점 중계하는 캐나다 민영방송 CTV는 '유력 금메달 후보'로 김연아를 소개하는 중이었다. 색동옷 입은 어렸을 때의 김연아 자료사진도 보였다. 진행자는 말을 이어갔다.

"한국에서는 이 유나킴을 '김연아'로 부릅니다. 패밀리네임(姓)이 먼저 앞에 나오죠. 하지만 '유나킴'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 식으로 맞춰서 그런 게 아니라, 그녀가 여기에 방문했을 때 자신을 '유나킴'으로 소개했어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진행자는 이런 '해설'을 세번이나 반복했다. 김연아를 '유나킴'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상대국의 관습을 무시하고 캐나다의 기준에 맞춘 게 아님을. 그날 CTV는 이렇게 사전 소개만 하고 정작 김연아가 출전하는 시합은 중계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대 벌어지는 캐나다와 독일의 하키시합을 중계했다. 하키는 캐나다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운동이니, 섭섭하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TV 생중계로 김연아의 피겨 장면을 보진 못했지만, 진행자의 '사소한' 해설은 밴쿠버에서 일주일 머물면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어떠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서로 섞여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는 다음날 교민들과의 저녁 자리에서도 화제에 올랐고, 교육청 공무원인 한 교민이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밴쿠버 시내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아이끼리 다툼이 있었어요. 학부모가 자기 아들과 다툰 학생을 찾아가 '같은 한국인끼리 똘똘 뭉쳐야지 그러면 쓰나'고 타일렀죠. 학교측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학부모를 불렀어요. '왜 한국인 학생이라고 하느냐. 우리 학교엔 한국 학생, 중국 학생, 캐나다 학생이란 건 없다. 같은 학생일 뿐이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 '애국심'이 남들 눈에는 '배타적' '전체주의적'으로 비칠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물론 밴쿠버에도 동계올림픽 동안 '빨간 단풍잎' 국기를 내건 차들이 돌아다녔다. 국기로 모자를 쓰고 국기로 망토를 걸친 채 "캐나다인, 캐나다인"을 연호하는 광경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 밴쿠버 사람들은 이런 '민족 혹은 국민끼리 뭉치는' 풍경에 아직 낯설어했다. 서울 도심을 꽉 메웠던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귀여운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밴쿠버는 다민족·다문화 도시다. 캐나다인 말고도 중국인, 인도인, 이란인, 필리핀인, 베트남인들이 섞여 살고 있다. 한국인도 유학생을 포함해 약 7만명쯤 된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피부색과 언어로 인한 차별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다. 이민자들이 형사사건에 연루돼도 '출신' 국가를 드러내는 일은 없다. 인권법정이 따로 있어, 이런 모욕을 느꼈다면 곧바로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 결과를 떠나 소송당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회다.

'단일민족'을 자랑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이런 '꽃다발' 사회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다. 이 땅에 외국인은 이미 100만명을 넘었다. 조선족들은 우리가 들어가 살 아파트를 짓고, 필리핀 청년들은 안산 공단의 기계를 돌리고, 스리랑카인들은 동해 바다에서 어선을 탄다. 무엇보다 우리말도 모르는 동남아 여인들이 농촌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낳고 있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얼굴이 왜 또래 친구들과 다른지를 처음에는 잘 모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들을 '별종' 취급하는 우월의식이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지 않을까. 밴쿠버 한인타운을 지나 도로변에 '5.99달러 점심스페셜'을 써붙인 값싼 음식점이 있었다. 주인은 한국에서 일한 적 있는 조선족 부부였다. "나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조선족이라고 업신여김받고 식당에서 일하던 아내는 종업원들에게 따돌림당했다. 그래서 여기로 올 결심을 했으니 한국에서 겪은 차별이 득이 됐다고 할까…."

세상은 상대적이다. 이런 우리가 이민을 떠난 가족 중 누군가가 현지에서 겪는 '작은' 차별에 몹시 상심하고, 러시아에서의 유학생 테러 보도에는 크게 놀라워한다.

[외국인들의 거침없는 한국사회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