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환 동북아시아연구소 연구위원

탈북(脫北)하기 전 여러 차례 함흥을 가 보았다. 북한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함흥은 항상 긴장감을 주었다. 기차역부터 늘어선 불량배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노렸고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평양시 건설장에서도 함흥 사람은 거칠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각 지역 청년 돌격대원들 수만명이 모인 공사장에선 패싸움이 벌어지곤 했는데 항상 함흥 청년들이 가장 지독했다. 조폭조직도 함흥에 가장 많아 보안원(경찰)들도 함부로 이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함경북도 국경선을 통해 중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이 함흥을 거쳐 내륙(內陸)으로 뻗어간다. 외부 정보의 중간 유통지역으로 북한에서 가장 깨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미 20년 전부터 함흥 시장은 '고양이뿔'을 빼놓고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활성화됐다. 이번 김정일의 화폐개혁으로 돈을 빼앗긴 시장 상인들이 거세게 반발한 곳 중의 하나가 함흥이다. 시장 규모가 큰 만큼 피해도 컸다. 함흥 친구들 중엔 남한 방송을 듣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한 노래를 모르면 촌놈 취급받는 곳이었다. 북한 어느 도시보다 '저항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느 지역보다 공개 처형이 빈번히 벌어지는 도시가 함흥이기도 하다.

그 함흥에 김정일이 나타나 2·8비날론연합기업소 재가동을 축하하는 10만 군중집회를 열었다. 김정일은 한 번도 지방 군중집회에 참가한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다른 곳도 아닌 함흥에 간 목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북한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비료다. 따라서 김정일이 함흥에 간다면 흥남 비료공장에 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몰락을 상징하는 2·8비날론 공장에 갔다. 비날론은 석탄에서 뽑아내는 섬유로 질이 낮고 경제성이 없다. 그 생산비면 중국에서 더 좋은 섬유를 더 많이 살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세계에 의류용 비날론을 생산하는 곳은 북한밖에 없다.

김일성은 무려 100억달러를 퍼부어 평안도에 비날론 공장을 짓는 어이없는 짓을 하다 모두 고철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조그만 북한 경제가 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함흥 2·8비날론 공장도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는데 그걸 다시 살렸다고 대규모 축하 행사를 벌인 것이다.

김정일은 이를 통해 자신의 어떤 의지를 내외에 과시하려 한 것이 틀림없다. 계획경제가 망하고, 화폐개혁이 실패해 총리가 사과하고, 북한 내부가 혼란에 빠져 있다고 해도 절대 변화는 없으며, 개혁·개방도 없다는 '비장한' 의지다. 외부에서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비날론 공장이지만 남이 뭐라든 제 식대로, 제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김정일이 북핵문제나 개혁·개방문제에서 진정성을 갖고 전향적 선택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의 그 많은 지역 가운데서도 특별히 함흥을 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지금까지 지방에서 김정일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신변(身邊)에 대한 병(病)적인 불안감을 갖고 있는 김정일은 완벽한 경호가 불가능한 지방 군중집회를 꺼렸다. 하지만 이번에 지방 군중집회를 열고 그것도 치안(治安)이 불안한 함흥에서 10만명을 묶어 세웠다. 기자는 그가 인민들의 저항과 불만에 선전(宣戰) 포고를 한 것으로 느꼈다. 심상찮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