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서 배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전남 신안군 임자도. 23일 섬은 무거운 침묵에 싸여 있었다. 면 소재지 진리에 있는 임자파출소와 바로 옆 면사무소에는 경찰 조사를 받으러 온 주민들과 경찰관,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등의 발길이 종일 이어졌다. 주민들은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섬 곳곳 마을에서는 집이나 마을회관을 찾아 주민들을 모아놓고 무엇인가를 묻고 확인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런 풍경은 지난 18일부터 벌써 6일째 이어지고 있다.

3721명이 사는 47㎢의 이 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지난달 29일 치러진 임자농협 조합장 선거를 앞두고 금품이 대거 살포됐다는 혐의를 잡은 경찰이 지난 18일부터 20여명을 섬에 상주시키며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조사 대상은 투표권자(조합원) 1093명 모두다. 섬 1717가구의 64%로 세 집 중 두 집이 조사받고 있는 셈이다. 경찰은 구체적 혐의가 포착된 조합원은 파출소와 면사무소 등에서 조사하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집이나 마을회관 등을 찾아 면담을 통해 금품수수 여부를 확인해왔다. 23일까지 조사 또는 확인 작업을 끝낸 조합원은 300여명이다. 앞으로도 확인을 거쳐야 할 조합원이 700여명이나 남은 셈이다.

경찰은 "가능하면 조용하게, 생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이달 말까지는 조사를 마무리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임자농협 조합장 선거는 유례없이 치열했다. 5명의 후보가 출마, 격전을 치렀다. 당락이 1표 차로 갈려 3차례나 재검표를 했고, 당선자와 최하위 득표자 간 표차도 109표에 불과했다. 투표율도 93.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치열한 선거전이 전개되면서 선관위와 경찰은 '돈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주시했으나, 선거 직후까지 구체적 정황을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 12일 한 조합원의 제보가 경찰과 선관위 양쪽으로 들어왔다. "후보자 2명으로부터 각각 100만원과 50만원의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경찰과 선관위는 제보 내용을 토대로 수차례 합동 회의를 거친 끝에 지난 18일을 'D-데이'로 잡고, 합동조사에 나섰다.

섬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일 새벽. 22개의 마을에 차례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주민 여러분, 지난번 농협조합장 선거에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셔서 높은 투표율로 선거가 잘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선관위와 경찰의 조사 결과 후보자들이 상당수 조합원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가 포착돼 조사 중입니다. 돈을 받으면 법에 따라 최고 50배의 과태료를 물게 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금품수수 사실을 자진 신고하면 과태료를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자수를 권하는 방송 이후 섬 마을은 얼어붙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이번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경찰은 "일단 돈을 주고받은 혐의가 입증되면 모두 입건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처벌 범위와 수위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파·마늘·새우젓·천일염 등 풍부한 물산과 대광해수욕장 등 관광지로 잘 알려진 임자도는 이번 조사로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입게 됐다. 한 주민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돈 받은 사람들도 다 뉘우치고 있을 텐데 그만 끝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자농협 직원도 "참고인 진술이다 뭐다 해서 불려다니는 바람에 일손이 안 잡힌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란 희망적인 기대도 나오고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폐쇄성 탓에 과거에는 '돈을 주고받아도 서로 입을 맞추면 감춰지더라'는 식의 인식이 있었으나, 이번 일로 '이제는 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김용환 신안군선거관리위원회 사무과장은 "최근 며칠 새 주민들을 만나면서 '더 이상 돈선거는 안 되겠구나. 지방선거 때는 누가 돈을 준다고 하면 오히려 욕을 먹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