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초. 다섯 번째의 올림픽 도전을 마무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70초였다. 그 끝을 향한 출발선에 선 이규혁(32·서울시청)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70초에서 1초만 더 빨리 끝낼 수 있으면 충분했다. 만약 리치먼드 오벌이 한 번만 68초를 허락해 준다면…. 16년의 기다림은 찬란한 금빛으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

총성이 울렸다. 아웃 코스에 선 이규혁은 70초와의 싸움을 위해 튀어나갔다. 인 코스에 선 핀란드의 미카 포탈라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1000m 레이스의 첫 200m까지 16초39. 포탈라(16초27)보다는 약간 뒤졌으나 바로 앞 조에서 뛰었던 모태범(21·한체대)의 랩 타임과 똑같았다. 이규혁은 두 번째 코너(곡선 주로)를 지나 아웃 코스에서 인 코스로 자리를 바꾸고 가속을 시작했다. 600m를 통과하는 순간, 전광판엔 41초73이라는 기록과 함께 '1'이라는 숫자가 떴다. 전체 19조 중 17조에 배정받았던 이규혁이 그때까지 달린 선수 중 가장 빨랐다는 뜻이었다. 18일(한국시각)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인 리치먼드 오벌의 6000여 관중은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코리안 챔피언'을 기대하는 함성이었다.

이제 마지막 400m가 문제였다. 네 번째 코너를 지나면서 아웃 코스로 빠졌다. 인 코스에 비해 큰 반원을 그리며 돌아야 하기 때문에 거리는 같아도 체력 소모는 더 커지는 구간. 선수들끼리 하는 말로 '혼수상태'에서 달려야 했다. 하지만 노장의 다리는 조금씩 무거워졌다.

18일 스피드 스케이팅 1000m 경기에서 이규혁이 역주하고 있다. 그는 혼신을 다했지만 아쉽게 9위에 머물렀다.

이규혁은 다섯 번째 코너를 돌아 피니시 주로에 접어들면서 결국 포탈라에게 역전당했다. 1분09초92. 70초에서 1초가 아니라 0.08초만 앞당겼을 뿐이었다. 두 조를 남긴 상태에서 7위에 머물렀다.

"다섯 번째 올림픽인데, 이젠 민망해서라도 하나 따야죠"라고 했던 올림픽 메달이었다. 13세에 단 태극문양을 20년째 놓치지 않은 한국 빙상의 간판. 19세였던 1997년 1000m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2001년엔 1500m 세계기록도 세운 천재. 세계스프린트선수권 통산 3회(2007·2008·2010) 우승 등 10년 이상 세계 정상권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이규혁이 간절히 원했던 소망은 결국 물거품이 됐다.

모든 힘을 쏟아 부은 이규혁은 유니폼 모자를 벗어버리고 가슴 쪽 지퍼를 내리더니 연습 주로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스케이트를 신은 다리를 영하 9.4도의 차가운 빙판에 올려 둔 채였다. 차가운 바닥도 안타까움에 타들어가는 그의 몸을 식히지 못했다.

숨을 고른 이규혁은 1000m 은메달을 딴 모태범에게 다가가 "잘했어"라고 축하 인사를 하곤 라커룸으로 돌아가 한참 머물렀다. 텅 빈 경기장에서 SBS 해설위원이자 국가대표 선배인 제갈성렬(40)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마지막 올림픽 여운을 느끼고 싶은데 관중이 없어." 제갈성렬 해설위원은 울먹이는 후배에게 "규혁아, 너는 영원한 챔피언이야"라고 위로했다.

이틀 전인 16일 500m의 부진(15위)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이규혁은 당시 경기를 세 시간 앞두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 이인숙씨에게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준비됐어. 요번엔 정말 빈틈없이 준비했는데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까 떨리네. 하지만 엄마가 있으니까 할머니가 계시니까 동생 규현이도 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야. 끝나고 통화해.'

그날 경기는 정빙기 고장으로 1시간 반 지연됐고, 미리 몸을 풀었던 이규혁은 떨어진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빈손'으로 떠나지만, 이규혁의 16년 올림픽 도전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이강석·모태범·이상화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모태범은 "규혁이 형은 저의 우상이었다. 지금 내가 쓰는 주법도 형한테 배웠다. 모든 면에서 진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무관(無冠)의 챔피언'은 20일 귀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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