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시인 정일근은 중학생이 꼭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하라면 국어사전을 첫자리에 꼽는다. 모르는 우리말 어휘를 사전 한장 한장 넘겨가며 찾는 즐거움을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한다는 뜻에서다. 그는 요즘도 동료 시인들과 차를 마시며 시 합평회(合評會)를 하다 궁금한 말이 나오면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국어사전에서 답을 찾아주고 1000원씩 받는다고 한다. 그는 이 돈을 차곡차곡 모아 국어사전이 꼭 필요한 곳에 선물할 생각이다.

▶소설가 김소진의 문학수업 출발점은 신기철·신용철 편 '새 우리말 사전'이었다. 1년 반 방위병 생활을 하며 이 사전을 독파하고 필요한 낱말, 관용어구, 속담들을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베꼈다. 그의 소설이 '길차다(아주 미끈하게 길다)' '수꿀하다(무서워서 몸이 으쓱하다)' 같은 우리말을 능란하게 부려 '김소진판 우리말 사전'이라는 말을 듣는 게 괜한 일이 아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스물두살 신경숙은 퇴근 후 집 앞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습작을 하곤 했다. 나무의자에 앉은 채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얼굴을 대고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몰라/ 숨 막힐 때/ 너는 마침내/ 편히 쉬게 해준다/ 사전이여/ 날숨인 소리와/ 들숨인 뜻을 우리는/ 숨쉬며 살거니와/ …/ 너를 펼치며/ 씨 뿌리고/ 너를 펼치며/ 거둔다…"(정현종 '사전을 기리는 노래'). 어느 철학자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모국어의 집' 국어사전은 우리 삶의 터전이다.

▶국어사전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다. 세상이 인터넷 검색과 전자사전의 간편함에 빠져 종이사전을 멀리하면서 경영이 어려워진 출판사들이 잇따라 사전편찬팀을 없애고 있다고 한다. 시사출판사, 교학사, 금성출판사는 사전팀을 아예 해체했다. 이희승 국어사전을 내는 민중서관은 인원을 크게 줄인 탓에 10년 넘게 개정증보판 작업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문제는 종이사전의 위기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전자 국어사전은 종이사전의 콘텐츠를 그대로 옮겨실은 복사물일 뿐이다. 시대변화에 따라 뜻이 변하거나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말 어휘를 끊임없이 지켜보고 뜻을 매김하는 작업을 소홀히 한 채 열매 따먹기만 해서는 모국어라는 나무는 말라죽고 만다. 정부가 종이사전의 퇴조(退潮)를 상업출판사의 경영문제로만 보고 팔짱 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