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디딜 틈 없이 쌓인 책더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훅 끼치는 헌책 냄새, 리어카 가득 책을 싣고 와서 부려놓는 중간도매상들…. '헌책방'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러한 통념을 깨는 '신개념 헌책방'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성동의 헌책방 '가가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손님들이 책을 고르고 있었다. 6~7평 규모의 자그마한 공간에 3000여권의 헌책들이 소설·미술·건축·인문 등의 분류 체계에 따라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이곳을 찾은 홍지원(23)씨는 "기존 헌책방에 비해 깔끔해서 책을 찾기도 편리하고, 조용해서 좋다"고 말했다.

지난 1일 회원들로부터 책을 위탁받아 판매하는 서울 종로 구 창성동의 헌책방‘가가린’에서 한 손님이 책을 고르고 있다.

2008년 6월 문을 연 이곳은 인근의 디자인 공방, 갤러리, 카페 등의 주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운영 방식도 독특하다. 중간도매상이나 손님으로부터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로부터 책을 위탁받아 위탁자가 매긴 가격에 판매한 후 수수료 30%를 뗀 금액을 돌려준다. 매니저 차승현씨는 "원래 소비지향적인 공간을 지양하고 책의 순환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상업성을 되도록 배제했다"고 했다. 2008년과 2009년 연말에는 회원들이 내놓은 헌책 등 물품의 옥션을 열었다.

공익재단 '아름다운 가게'는 2004년 파주 출판단지 내에 문을 연 '보물섬'을 필두로 현재 전국에 다섯 곳의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 헌책방들은 책을 사지 않고 기증받고, 팔아 얻는 수익은 소외계층을 위해 기부한다. 이들 헌책방에서는 종종 문화행사도 열린다. 아름다운 가게 홍보팀 김광민 간사는 "전시회나 강연회 등을 위해 공간이 필요하다고 신청하면 매장이 쉬는 날이나 업무시간 이후에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고 밝혔다.

상업성을 배제한 '공동체형 헌책방'의 맞은편에는 '기업형 헌책방'이 자리한다. 2006년 3월 서울역에 1호점을 내고, 지난해 9월 신촌에 2호점을 낸 일본계(系) 중고서적 판매 체인점 '북오프'가 대표적이다. 북오프 신촌점장 구보타 아쓰시씨는 "하루에 200명 정도의 손님이 책을 산다"면서 "매장을 쾌적하게 유지하고 책을 손님들이 보기 편하도록 진열한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서점 북스리브로는 지난해 6월 강남점을 헌책만 파는 '유북'으로 리모델링했다.

'신개념 헌책방'의 등장에 대해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헌책방이 정겹지만 낡고 쇠락한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공동체형 헌책방이든, 기업형 헌책방이든 활성화만 된다면 책의 순환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