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겠네 못살겠네 오예물을 다 제하고 신선 공기 받는 것이 위생상에 필요인데 똥통 설시한 이후로 게딱지와 같은 집에 방문 열고 나서면 똥통 부엌 한데 붙어 음식기운 똥냄새가 바람결에 혼합하니 구역질나서 못살겠네."(대한매일신보, 1909.4.16.)

1894년 초봄 서울을 처음 방문한 영국 비숍 여사의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은 "겨우내 쌓인 온갖 쓰레기,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탕, 냄새투성이"였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비숍이 떠나간 지 10년 후에도 서울의 위생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조선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한 미국인 헐버트도 "조선인은 아주 초보적인 위생상식마저도 배우지 못하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수채만 있으면 만사가 충분한 듯하며" "도로는 온갖 오물의 집적소이다"(대한제국멸망사)라 하였다.

길거리는 용변으로 인해 하수구나 다름없으며 시궁창 물이 마당이나 길가에 방치되었다. 원래 똥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비료로 인식되었다. 충주의 한 자린고비가 걸인을 쫓기 위해 문 앞에 똥 한 사발을 뿌리자 며느리가 대경실색하여 가로되 똥 한 사발은 내년에 보리가 몇 섬이 될 터이니 차라리 쌀 한 되를 주라 하자 자린고비가 그 말을 듣고 오래도록 뉘우쳤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러나 20만 서울 주민이 매일 배출하는 분뇨는 처치곤란이었고, 길거리는 외국인이 견뎌내기 힘들 정도의 비위생 자체였다. 문명과 야만은 위생과 비위생으로 구분되었다.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누며 집 밖으로 이를 유출하는 것은 문명국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보통학교 학도용 수신서).

일본인의 이주가 늘어나자 통감부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서울의 주거환경을 강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1907년 12월 한성위생회를 창설한다. 일본인 내부 차관이 위생회장이고 실행위원장은 경시총감이었다. 이듬해 4월 제예(除穢)규칙을 공포하여 위생회가 쓰레기와 분뇨를 반출토록 하고 노상에서 용변 보는 것을 금했다. 한성위생회는 분뇨 운반용 마차와 지게를 갖추고 자루 달린 바가지로 1말 크기 나무통에 분뇨를 퍼담아 마차나 지게(소공동 거리의 사진관 옆에 한 남자가 물지게인지 똥지게인지를 지고 있다)로 반출했다. 매월 평균 500명의 인부가 각 지역을 분담하고 순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위생회가 반출한 분뇨를 농민들에게 판매하자 조선의 거름장수들은 "똥 한 바리까지 일인에게 빼앗겼다" 탄식하고, 농민들도 "똥이 죄다 일인의 입으로 들어가매 그 값이 황금과 같다"고 아까워했다(매일신보 1908.10.11.). 위생회는 분뇨와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대가로 집집마다 월 2전을 징수하였다. 이전에는 거름장수나 농민들이 알아서 분뇨를 가져갔기 때문에 따로 돈들 일이 없었지만 이제 위생비를 내지 않으면 순사들이 강제 징수하고, 심지어 안채에 뛰어들어 군도로 위협해 임신한 부인이 놀라 낙태하는 일도 벌어졌다(대한매일 1909.4.22.).

근대적 도시위생은 이처럼 강압적으로 도입되었지만 도시는 온통 악취가 진동했다. 황성신문은 이를 비꼬아 '적분천지(積糞天地)'(1908.10.6.)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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