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 분쟁조정위원회에는 4명의 변호사가 활동한다. 그 중에서 두 명이 축구선수 출신이다. 하기복 변호사(36)와 이중재 변호사(35)다.

축구선수는 잘해야 프로팀 거쳐 지도자 되는 거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보니 이들의 변신이 유독 눈에 띈다.

하 변호사는 광주 북성중학교 3학년 때까지 공을 찼다. 전북 고창 무장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으나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광주 누나 집에 보내면서 잠시 축구화를 벗었다. 한데 중학교 1학년 체육시간에 축구 하는 걸 본 축구부 감독이 용케 알아보고 축구를 권했다. 그 길로 축구화를 다시 신었다.

반대하신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오전 수업은 꼭 들었고, 책을 놔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휴일이면 학교에 가 공부를 했다. 덕분에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었다.

공도 제법 잘 찼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주위 칭찬이 자자했다. 하 변호사 자신도 "계속 운동했으면 프로선수는 됐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공부와 운동, 양수겸장은 2학년 말 해남 전지훈련 때 균형을 잃고 말았다. 부평중과의 연습경기 때 오른 발등을 다쳐 깁스를 한 것이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더는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하필 주장이 다치자 난감해진 감독이 8월 시도대항전까지만 뛰어달라고 했다. 그 대회가 축구선수로는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9월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고창으로 돌아가 영선고에 진학했다. 공을 차면서 조금씩 해 둔 공부가 큰 도움이 됐다. 공부를 잘하니 선생님들이 앞다퉈 지원해 줬고, 1학년 중반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94학번으로 동국대 법학과에 진학해 96년 말 서울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고, 2001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렇다고 축구에 대한 열정을 버린 건 아니다. 지금 소속된 축구 모임만 5개다. 서울변호사 축구단, 수원변호사 축구단, 사회인 축구팀 유나이티드원, 동국대 OB팀, 그것도 모자라 사무실이 있는 용인의 동네 조기축구회에까지 들었다. 한-일 교류전도 뛰고, 세계변호사월드컵에도 출전해 왔다. 2008년 스페인에서 벌어진 제14회 월드컵에선 8골로 득점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저는 축구로 얻은 게 참 많습니다. 대인관계도 그렇고, 체력도 그렇고…. 특히 축구로 다져진 체력은 사법고시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죠. 코피를 두 번 정도밖에 안 흘렸으니까요."

이중재 변호사는 선수생활을 더 오래 했다. 강화도 길상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을 시작했고, 제대로 된 축구선수가 되려고 김포 통진중으로 유학 가 통진고를 졸업할 때까지 무려 6년이나 숙소 생활을 했다. 최전방 공격수로 뛰었는데 고2 때 전국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고, 고3 때 주장 완장까지 찼으니 실력이야 불문가지다.

아들 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운동을 허락한 부모님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공부 안 하면 후회한다"며 아들을 자극했다. 고3 2학기에 특기자로 홍익대 건축학과 입학이 확정됐고, 그해 11월 홍익대 축구팀에 합류해 훈련을 시작했다. 거기서 낯뜨거운 일이 발생했다. 명색이 대학생이라고 훈련일지를 영어로 쓰게 하는데 손 하나 못 댄 것이다. 심지어 '인스텝킥'의 철자를 불러주는 데도 받아쓰지를 못했다. 그러자 친구가 '굿 모닝' 한 번 써 보라고 했다.

"굿 모닝도 못 썼습니다. 대문자 소문자도 구분 못 했는걸요. 내가 많이 모자란다는 걸 느꼈어요. 하기야 고등학교 때 영어로 제 이름도 못 썼으니까요."

'굿 모닝 사건'으로 망신한 지 얼마 안 돼 또 하나의 충격적인 일이 터졌다. 영어로 된 간판을 못 읽어 미팅 장소에 나가지 못한 것이다. 신촌역 옆 'PARADISE' 커피숍이었는데 한글 '파라다이스'만 찾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어머니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연습 도중 발목을 다쳤고, 그 일을 계기로 축구화를 벗어 버렸다. 그리고 큰 결정을 했다.

'어차피 프로로 가기는 힘들고, 실업팀 가 봐야 미래가 빤하다. 늦더라도 새로운 삶을 찾자.'

2학년이 되면서 책을 잡았다. 수학적 개념이 약해 학원에서 중학교 과정을 들었다. 97년 말 제대 후 다시 학원에 나갔다. 한데 건축 공부는 가히 지옥이었다. 적성에도 안 맞을뿐더러 도저히 졸업할 자신이 없었다.

"98년 말부터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했어요. 여자친구에게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려고요. 저 자신을 테스트한 거죠."

민법 공부를 하다 보니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게다가 합격증까지 받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결국, 자퇴를 하고 2000년 방송대 법학과에 들어가면서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꼬박 5년을 매달린 끝에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책을 많이 읽은 게 도움이 됐어요. 공부는 안 했어도 소설을 좋아해 이틀에 한 권꼴로 읽어댔거든요. 덕분에 책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두꺼운 책에 대한 부담감도 없어졌지요. 지금도 그 책들을 다 갖고 있는데 한 200~300권 정도 됩니다."

새벽운동 끝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자유시간이었는데 1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에 책을 읽었다. 그게 고시 공부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어려서부터 '사'자 직업을 갖게 될 거란 말을 들었다. 부모님이 사주를 보고 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운동도 못 하니 장의사나 되나 보다" 했다.

대학 때 미래가 두려워 점을 보러 갔을 때도 "지금 나무 목(木)자 관련 학과에 다니는데 곧 바꾸게 될 테고, 결국 '사'자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봤던 게 공인중개사 시험이다. 그게 사법고시까지 뻗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지금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운동하도록 허락해 주시고, 또 공부하도록 허락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자식들에게도 범죄만 아니면 뭐든 원하는 걸 시켜줄 생각입니다."

축구선수 출신 '공부의 신'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다 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운동을 하면서도 하 변호사는 수업을 들었고, 이 변호사는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야구계에서는 고교 2학년 때까지 선수로 활약하다 작년 11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인하대 법학과 출신의 이종훈씨(29)가 있다. 한편, 스키 국가대표 출신의 김권성씨(35)는 98년 제42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이목을 끌었다. 건국대 1학년 때인 93년 제23회 회장배대회 4관왕에 올랐을 정도로 기량이 출중했으나 무릎 인대 부상으로 스키를 접으면서 책을 폈다. 한자 외우기부터 시작한 그는 5년 만에 행정고시 합격증을 받아 들었고, 공무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정부 지원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 최재성 기자 kkachi@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