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선 정치부 차장대우

"아가씨, 잠깐 시간 있으세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에 근무하던 친구가 어느 날 거리에서 이런 '구식 작업 멘트'를 들었다고 한다. 고개를 돌려 근처 벤치에 앉은 사람들을 흘깃 봤다. 그러나 한국 남자는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걸어가는데, 이번엔 "커피 한잔 하실래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네팔 남자였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언어와 문화 면에서 한국 사람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친구는 그때 '한국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한국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에 가 본 적도 없으며 한국 문화를 낯설게 생각하는 주변의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에 비하면, 그 네팔인 쪽이 훨씬 더 한국인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인'의 정의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은 역대 최고치인 약 2만5000명이었다. 2008년 약 1만1000여명이었던 데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출신 국가도 다양해서 중국·베트남·필리핀·남미와 아프리카 국가까지 총 49개국이다. 2007년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가 100만명을 넘어섰고, 교과서에선 '단일민족'이란 표현이 사라졌다.

'필리핀계 한국인', '파키스탄계 한국인'이 늘어나면서 군대도 달라졌다. 국방부는 최근 "다문화가정 출신 입영 예정자들끼리 동반 입대해서 복무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면서, "인종과 피부색 등의 차별금지 조항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난해 5월 기준으로 다문화가정 출신의 16~18세 남자는 3410명이다. 이들의 입대가 계속 늘어나면 10년, 20년 후 우리 군대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현행 병역법은 매우 '인종차별적'이다. '징병검사 대상자로서 외관상 식별이 명백한 혼혈인'일 경우 '징병검사를 실시하지 아니하고 제2국민역으로 편입'될 수 있다고 했다. 병무청 관계자에 따르면, 외관상 식별이 명백한 혼혈인이란 흑·백 혼혈인을 말한다. 중국·일본 등 아시아계는 겉으론 차이가 드러나지 않으니 괜찮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다문화사회'란 간판을 걸고 '세계화'를 외치지만, 알고 보면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던 셈이다.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인'이란 의식과 자부심은 국적을 갖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란 확신이 생길 때 매력을 느끼고 애국심도 갖게 된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미국'이란 책에서 미국인을 규정하는 핵심요인은 '미국의 신조(American creed)'라고 했다. 미국도 과거엔 인종·민족·이념·문화의 측면에서 미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그러나 다인종·다민족 사회가 되면서 인종과 민족 기준은 사라지고, 대신 영어, 기독교, 개인주의 가치관, 근로윤리 등에 대한 믿음이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묶는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의 업적은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에 중심적이었던 인종적 및 민족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개인들이 능력에 따라 평가되는 다민족 다인종 사회를 이룩한 것"이라고 했다.

귀화자와 다문화 가정 자녀와 새터민 등 한국인의 범주는 점점 더 넓어지는데, 다 같이 "나는 한국인"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정체성의 고리는 여전히 분명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정신'이 없다면, '더 큰 한국'이 아니라 '더 복잡하게 갈라진 한국'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