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구나!"

3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방위사업청 정문 앞. 쌀쌀한 날씨에 코끝이 빨갛게 언 중년 남성이 휘둥그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짧은 머리에는 군데군데 새치가 보였고, 이마와 입가에 깊은 주름이 팼다. 신기한 듯 정문 안 건물을 살펴보던 신영순(42)씨가 환하게 웃었다.

"여기가 제가 다닐 직장입니다. 내일부터 출근이라 미리 길도 익히고, 어떤 곳인지 한번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날 오전 상경한 신씨는 서울 신림동 한 고시원에 짐을 풀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10여분간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섰던 그는 담장을 따라 건물 둘레를 천천히 돌았다. 걸을 때마다 왼쪽 다리를 절뚝였다.

2010년은 신씨에게 너무도 특별하고 반가운 새해다. 신씨는 지난해 11월 24대1의 경쟁률을 뚫고 국가직 7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장애를 안고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살아온 그에게는 첫 직장이나 다름없다.

"저한테 직장이 생겼다는 게 실감이 안 납니다. 정말 열심히 일할 겁니다."

신씨는 충북 충주의 시골마을에서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농사를 지었다. 돌이 갓 지났을 무렵 그의 왼쪽 다리가 점차 딱딱해졌다. 굳어버린 다리는 뒤틀리고 비쩍 말라갔다. 소아마비였다. 친구들은 그를 '아프리카 다리'라고 놀렸지만 다리를 저는 것 외에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다(지체장애 5급). 신씨는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했다.

부모는 마을에서 가장 너른 논·밭(2000평·6600㎡)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씨가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부터 가세(家勢)가 기울었다. 새벽부터 밭을 일구던 아버지는 자꾸만 풀썩 쓰러졌다. 눈 흰자위엔 노란빛이 감돌았다. 복수(腹水)가 차올라 숨쉬기 힘들 만큼 배가 불렀다. 간경화였다. 병원비로 논과 밭을 하나 둘 팔았고, 신씨가 고등학생이 되던 1984년 겨울 그의 가족은 전세금 300만원만 손에 쥐고 충북 청주로 나와야 했다.

단칸 월세방(29㎡·9평)에 여덟 식구가 살았다. 방 한쪽에 몸져누운 아버지는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식당에서 일하며 6남매를 키웠다. 신씨는 "매달 치르는 대학입시 모의고사비 1000원 낼 돈이 없어 친구들 보는 앞에서 맞았습니다. 등록금도 매번 꼴찌로 냈죠. 점심은 항상 굶었습니다. 친구들이 돌아가며 내 도시락까지 싸왔습니다. 그 덕분에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3일 불혹을 훌쩍 넘긴 늦깎이 공무원 신영순씨가 4일부터 출근할 서울 용산구 방위 사업청 앞을 찾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그는 반에서 꾸준히 7·8등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신씨는 "고3 때 어머니한테 '대학 가고 싶다'는 말을 한 번 꺼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고 했다. 1987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씨는 생계를 위해 곧바로 공사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힘을 못 썼기 때문에 목재 같은 건축자재를 정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일당 2만원을 어머니께 드리고 밤에는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틈틈이 공부를 한 신씨는 1990년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한림대 경제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그는 "둘째 형만 대학에 보낸 어머니가 원망스러워 일부러 집에서 먼 곳을 택했다"고 했다.

대학시절의 낭만도 잠시였다. 그의 몸은 점차 쇠약해졌다. 이듬해부터 머리가 어지러워 자주 주저앉았다. 기침을 하면 피가 섞여 나왔다. 80㎏이었던 몸무게가 47㎏까지 떨어졌다. 신씨는 "병원에 가니 '결핵 때문에 폐·위·대장까지 다 심각하다'고 했다"며 "몸이 너무 약해져 약을 먹었는데도 잘 낫지 않았다"고 했다.

병마와 씨름하느라 성적이 떨어진 신씨는 장학금마저 끊겨 4년 뒤 학업을 중단하고 청주로 돌아왔다. 그는 "'난 뭘 해도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름에 젖어 병상에 누워 있는 아들을 어머니 이현수(71)씨가 지키며 보살폈다.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한 신씨는 서른이 돼서야 몸을 추슬렀다. 그는 또다시 공사판을 전전했다. "힘도 기술도 없는데 몸까지 불편하니 써주겠다는 곳이 없었어요. 결국 10년 가까이 닥치는 대로 막노동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몸 약하고 벌이도 시원찮았던 그에게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3년 전 신씨는 다시 책을 붙들었다. 그는 "나이를 먹어가는데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정적인 일자리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도 꼭 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주택관리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두꺼운 법률·회계 교재에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했다.

5개월 만에 자격증을 취득한 신씨는 아파트 관리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이력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는 "제가 다리를 저는 걸 보고는 모두들 피했다"고 했다. 신씨는 2008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부동산 중개소를 차렸지만 그마저도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2009년 초 막막함에 휩싸여 있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신씨는 "신문에서 우연히 '공무원 시험의 나이 제한 상한선이 없어진다'는 기사를 봤다"며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어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부터 외웠습니다.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작년 11월 9일 오후 6시 신씨는 "국가직 7급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났다"며 "무뚝뚝하던 어머니도 껑충껑충 뛰며 좋아하셨다"고 했다. 어머니 이씨는 "뒷바라지도 못해 줬는데, 이렇게 좋은 직장에 취직해 정말 다행"이라고 했다.

신씨는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나이가 많아 따돌림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고 했다. "두렵기도 하지만 새해를 기다린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신입사원답게 궂은 일은 다 도맡아 할 겁니다."

["장애는 '틀린 것' 아니라 '다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