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3월 5일 창간 후 조선일보가 겪어야 했던 풍상(風霜)의 역정은 잦은 사장 교체에도 드러난다. 조선일보 초대 사장에는 주요 자금원이었고 발기인 39명 중 11명이 속해 있던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 조진태(趙鎭泰·1853~?)가 취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친목회의 관계는 5개월 만에 파경에 이른다.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친목회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진태가 사장에서 물러나고 변호사 출신 유문환(劉文煥 ?~?)이 1920년 8월 15일 2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친목회와 단절하고 새로 사장을 맞이한 조선일보는 항일(抗日) 논조를 강화하며 압수와 정간을 되풀이하게 된다. 유문환은 1921년 4월 8일까지 사장으로 재직했다.

1921년 4월 6일 창간을 1년 갓 넘긴 조선일보는 저항적인 편집과 고질적인 자금난으로 휴간에 들어갔다. 구독료 인상 등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때 조선일보의 논조를 부담스러워하던 총독부는 매국노 송병준(宋秉畯·1858~1925)을 앞세워 조선일보 인수 공작을 펼쳤다. 4월 8일 조선일보 판권(版權)을 인수한 송병준은 반일(反日)적인 편집국 분위기를 감안한 때문인지 자신이 사장에 취임하지 않고 뜻밖에도 황성신문 사장 등을 지내며 열렬한 반일투사로 이름을 날렸던 남궁훈(南宮薰)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송병준의 계산은 노쇠한 남궁훈을 '얼굴마담'으로 삼아 실질적인 경영은 아들 송종헌(宋鍾憲)에게, 편집은 매일신보 출신인 친일(親日) 언론인 선우일(鮮于日)에게 맡긴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기개의 언론인이었던 3대 사장 남궁훈이 4월 11일 신문 복간 후 신문 제작에 적극 참여하면서 송병준의 계산은 빗나갔다. 남궁훈 사장하에서 조선일보 기자들의 반일 저항의식은 더욱 강화됐다. 남궁훈 사장과 편집국 기자들의 반일(反日) 성향은 1922년의 '3대 저항 캠페인'에서 정점에 이른다. 첫째, 개화와 친일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됐던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1월 별세하자 사회 일각에서는 사회장(社會葬)을 주장했고, 조선일보는 이에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했다. 치열한 논전 끝에 김윤식의 사회장은 좌절됐다. 둘째, 6월 18일자 조선일보에는 사이토(齋藤) 총독의 사직을 권고하는 장문의 기사가 실려 식민당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무단정치 때의 인물을 다시 정무총감으로 기용하자 사이토의 문화정치 표방은 사기라고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다. 셋째, 같은 해 7월 일본 니가타의 조선인 학살 사건을 고발하는 기사를 연일 보도했다가 삭제되는 일이 반복됐다.

조선일보 인수 후 적자가 계속되고 편집권 또한 자신의 손을 벗어나 항일 논조가 이어짐으로써 총독부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던 송병준은 결국 3년 만인 1924년 9월 13일 회사를 독립운동가 신석우(申錫雨·1894~1953)에게 넘긴다. 경영권을 인수한 신석우는 그날로 민족의 사표로 존경받던 이상재(李商在·1850~ 1927)를 4대 사장에 추대한다. 이때부터 조선일보는 본격적으로 경영과 편집 양면에서 민족지로서의 위상을 다져 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