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문화부 차장대우

"진보란 행복한 건가요? 나는 옛날 방식이 더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기술이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진보 아니겠습니까?"

일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집 '마돈나'에 실린 단편 '총무는 마누라'의 한 장면은 첨단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소설은 너무나 복잡해진 기술을 뒤쫓아가느라 전전긍긍하는 현대적 삶의 아이러니를 꼬집는다.

영화로도 유명한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쓴 76세의 미국 소설가 코맥 매카시도 최근 타자기를 바꾸면서 비슷한 말을 했다. 매카시는 1963년에 사서 50년 가까이 사용하던 구식 타자기 '올리베티 레테라 32'를 "너무 낡아서 쓸 수가 없다"며 지난달 처분했다. 그런데 그가 새로 장만한 타자기는 첨단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 동일 제품의 중고였다. 매카시는 젊은 시절 "가장 작고 가벼워서"라며 레테라 32를 샀던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지만, 이제는 "가장 익숙하다"는 이유로 옛것을 고집하고 있다.

'눈이 돌아간다'는 말로도 부족한 기술문명의 급속한 발달은 도처에서 중년 이상의 성인들로부터 경험과 지혜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고 있다. 활자의 발명 이후 수백년간 이어져 온 독서방식도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개발한 전자책 전용 단말기 킨들은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겨 온 독자들을 불안케 한다.

아날로그는 진정 디지털에 패배할 것인가. 오히려 그 반대의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런던도서전이 열렸던 지난 3월 영국 런던의 차링크로스 거리에는 '에스프레소 책'이라는 독특한 자판기가 등장했다. 자판기에서 원하는 책을 고르면 주크박스처럼 현장에서 책이 인쇄된다. 주문에서 제본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5분. 시내 서점에 가느라 시간과 차비를 낭비할 이유도, 인터넷 서점에 주문하고 며칠씩 기다릴 필요도 없다. 주목할 것은 이 기계가 첨단 디지털 기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웬만한 대형서점 뺨치는 50만권의 책이 디지털 정보로 집적되어 있다가 고객이 원하면 가장 전통적인 '인쇄물'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킨들의 최신 버전인 킨들DX도 아날로그 세대를 향해 노골적인 구애를 하고 있다. 가로 18.2㎝, 세로 26.3㎝인 크기는 아날로그 책의 모방이 분명하다. 디지털 콘텐츠를 아날로그 방식인 종이 위의 글씨처럼 보여주기 위해 pdf 파일로도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러니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세대에게 '적응하라'고 핍박한다기보다는 아날로그족(族)의 관심 밖으로 벗어날까 봐 노심초사한다고 해야 맞다.

'어떻게 하면 아날로그적 인간에게 불편하지 않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느냐'가 지금 디지털 기술의 가장 큰 과제이다. 미국 하퍼콜린스 출판사 대표인 빅토리아 반슬리가 "전자책의 성패는 소비자들이 디지털 콘텐츠에 돈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기자는 서가를 가득 메운 책을 사랑한다. 전자책 시대가 되어도 책꽂이에 칩을 꽂아둘 생각은 없다. 디지털 기술에 이런 요구도 하고 싶다. "칩 말고 멋진 책 모양으로 내 서가를 꾸며." 몇 해 전 독일의 주어캄프 출판사를 방문해서 사장과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종이책이 사라지고 전자책으로 대치될 것 같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서가에서 붉은 외피를 두른 양장본 책을 한 권 꺼내 들어 보이며 반문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