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는 김모(34)씨는 최근 내용증명 문서를 한통 받았다. '귀하가 판매 중인 티셔츠가 국내 상표권을 침해해 법적 조치를 준비 중입니다….' 김씨는 "샘플로 올려놨을 뿐 하나도 팔지 못했는데 법대로 하겠다니 억울하면서도 무척 겁이 난다"고 했다.

지금 김씨처럼 떨고 있는 업자들이 상당수다. 하나같이 티셔츠나 청바지 온라인 업체나 동대문시장 일대의 오프라인 업자들이다. 상인들을 벌벌 떨게 하는 이 '저승사자'는 대체 누구일까.

지세환(池世煥·34)에게 '저승사자'란 별명이 붙은 것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짝퉁 의류가 있는 곳은 끝까지 추적하기 때문이다.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는 가짜 의류 생산과 판매업체 적발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다.

지세환은 미국 서던 일리노이대에서 자동차공학을 전공했다. 1999년 귀국해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뿐이었다. 그랬던 운명이 2004년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선배 소개로 만난 토니 소렌슨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지세환과 소렌슨은 둘 다 공대 출신인데다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을 좋아해 마음이 통했다. 당시 소렌슨은 '폰 더치(Von Dutch)'라는 의류회사 CEO였다.

연예인 등 유명인사 마케팅이 먹혀들어 폰 더치 모자와 티셔츠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어느 날 소렌슨이 지세환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폰 더치가 한국에도 소개되면 좋겠다. 한국 총판을 맡아달라."

당시 폰 더치가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한 데는 공학도 출신 CEO 소렌슨의 기업전략과 디자인 아이디어 덕이 컸다. 지세환은 이런 점에 주목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대 출신도 의류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지세환의 사무실에는 진품과 가짜를 진열해 놓은 방이 따로 있다.벽면 가득히 티셔츠와 모자, 청바지 등이 걸려 있다. 요즘 업자들은 짝퉁 라벨 위에 빈 라벨 등을 덮어씌우는 방법으로 눈가림을 하지만,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지세환의 눈을 피하지는 못한다.

현실은 달랐다. 한국 총판자인 그는 티셔츠 한 장 팔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국내에는 '폰 더치'라는 상표가 등록돼 있었다. 국내 상표 보호 차원에서 생긴 '속지주의(屬地主義)' 등록 원칙을 이용해 누군가 선수를 친 것이다.

해외브랜드를 국내에 등록한 그 회사는 국내 여러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고 해외에서 수입한 가짜를 진짜처럼 팔기도 했다. 지세환은 경찰, 변호사, 변리사, 관세사 등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어느 누구도 뾰족한 해법을 내놓으며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경우가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상표인데 무슨 명품이냐, 직수입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핀잔도 들었다. 그는 원가 5억원어치 물건을 2000만원에 정리해야 했다.

이때부터 지세환은 '짝퉁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상표권 분쟁으로 손실을 본 그는 소규모 직수입 업체들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임을 알게 됐다. 이런 업체들은 손해를 보고도 소송비용 등이 부담돼 가만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2006년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동대문 등 의류시장에 직접 나가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짜를 파는 곳을 골라내 경고하고 손해배상 청구를 대신해주는 방식이다. 소송까지 갈 경우 파트너 관계를 맺은 법무법인이 대리한다.

2006년 "알면서도 가짜를 팔았다"며 백화점을 상대로 소송까지 벌인 지세환은 최근 전선(戰線)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쇼핑몰로 확대했다. 재작년에는 유명연예인이 차린 인터넷 쇼핑몰에서 짝퉁 모자를 파는 것을 잡아내 고소했다.

요즘 해외에서 뜨는 브랜드를 국내에서 무작위로 상표 등록하는 사례가 많다. '샤넬' '비아그라'같은 인터넷 주소를 비싼 값에 되파는 것처럼 상표 등록되지 않은 브랜드를 등록해 돈을 챙기는 '봉이 김선달'이 많아진 것이다.

지세환은 "한 사람 명의로 수백개까지 상표등록이 돼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짝퉁을 만들던 예전과 달리 완제품을 통째로 중국 등에서 들여오는 사례도 폭증했다.

그는 "최근에는 컨테이너 상자 2개에 가득 들어있던 명품 위조 청바지와 티셔츠 등이 적발됐다"고 했다. 세관에서 벌어지는 짝퉁 적발이 전장(戰場)에서의 전투라면, 지세환의 일은 간첩색출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세환은 "학창시절 생각지도 않던 일을 하지만 고객 회사의 가짜 적발 건수가 3~4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어든 걸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며 "'한국은 가짜 천국'이라고 여기던 외국의 패션회사들도 요즘 인식이 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불편해 했다. "생계 위해 가짜 몇점 파는 걸 노리는 사냥꾼"이라든가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짝퉁인지도 몰랐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는 일부 업자들 비난을 의식해서였을까.

"걸린 상인들 대부분은 '하나밖에 안 팔았다"고 발뺌해요. 우리가 위반업자 모두를 고소하는 건 아니에요. 인터넷 쇼핑몰은 판매 통계를 확인할 수 있으니 손해배상을 뒤집어씌울 것이라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