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프로 바둑기사는 고 조남철(趙南哲) 선생이다. 송원(松垣·조 九단 아호)의 일생은 곧 한국 바둑 여명기의 역사였다. 그는 14세 때 일본에 유학, 기타니(木谷實) 문하에서 현대 바둑을 익혀 1941년 만 18세 때 일본 기원 프로 등용문인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바둑이 사랑방 선비들의 도락에 머물던 그 시절 송원은 선진 문물을 익힌 유일한 유학파 엘리트였다.

1943년 송원이 6년간의 도일(渡日) 수업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한국 바둑계는 프로제도가 없는 불모지였다. 조남철은 프로기사 자격증을 따낸 최초의 한국인이지만 아직 '대한민국 프로기사 1호'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1945년 11월 창설한 한성기원을 근거지로 선진 바둑 보급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고 1948년 9월 전국위기(圍棋·바둑)선수권대회란 대규모 행사를 개최한다.

우리 바둑계에 처음 프로제도를 싹 틔운 행사는 1950년에 벌어진 제3회 전국위기선수권대회였다. 나이 새파란 '개혁의 기수'였던 조남철은 일정 자격을 갖춘 고수(高手)들만 그 대회에 초청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프로 초단을 주되 대회 풀리그 성적이 평균 75점을 넘는 기사에게 二단, 80점 이상이면 三단을 인정한다고 공표했다.

한국인 최초의 프로 바둑기사고 조남철(趙南哲·사진 맨 왼쪽) 선생 주도 아래 한·일 프로기사들 간의 교류전도 몇 차례 열렸다.

고수들이 국수(國手), 국기(國棋), 도기(道棋)로 통칭되던 시절이어서 단위 도입은 프로화의 뜻깊은 출발점이었다. 노(老)기객들로선 기사 개개인의 우열을 드러내는 숫자(단위)로의 호칭 변경이 마땅치 않았으나 개혁의 대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대회는 무사히 끝났고 조남철 혼자 三단을, 그리고 윤주병 민중식 등 13명이 초단을 받았다. 대한민국 첫 프로기사 14명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다. 전국위기선수권대회를 한국 바둑 프로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유는 단위제 확립 외에 한 가지 더 있다. 그 대회 대국보를 연재한 연합신문이 사상 처음 원고료를 지급했고, 그 일부가 해당 기사에게 전달됐다. 보잘것없는 액수였지만 대국의 반대급부로 '보수'를 받는 진정한 '프로화'가 이뤄진 것이다.

종로구 낙원동서 열렸던 제3회 위기선수권대회의 거행 시점도 주목할 만하다. 1950년 6월 20일부터 27일까지 6·25 개전(開戰)의 정중앙에서 치러졌다. 38선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저 정도의 대포 소리는 종종 듣던 것"이라며 대회를 강행한 것이다. 이후 조남철의 주도 아래 한·일 프로기사들 간의 교류전도 몇 차례 열렸다.

송원이 창설한 한성기원이 조선기원, 대한기원을 거쳐 1954년 한국기원으로 바뀌기까지의 '간판 변천사'는 바로 한국 바둑 굴곡의 역사였다. 개척자 조남철은 2006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했지만 한국 바둑은 10여년째 변함없이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