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火)

1978년 여름 인천 부근의 무인도. 정보사 소속 특수부대 요원 이광선(李光善·53)은 그날도 폭파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특수정보부사관'이었다. 정보사 특수임무부대는 요즘에도 들어가기 어렵다.

신체검사 1등급은 기본이다. 40㎏짜리 모래주머니를 메고 50m 달리기, 2㎞ 달리기, 역기 등 체력 검정 7개 종목에 무술능력까지 테스트한다. 합격 기준도 까다롭다. 30년 전 이 부대는 북파공작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그때 그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짧은 머리에 맨눈 빼고는 비슷한 점을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폭약 전문가 이광선은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동료와 폭발물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폭발 효과가 눈에 잘 띄지 않는 낮이어서 비닐에 담은 휘발유를 폭약 위에 올려놓았다. 폭발과 동시에 불길이 확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광선과 동료가 이 작업을 할 때 누군가가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으악!" 온몸에 불이 붙었다. 폭약이 터지진 않았지만 발화가 돼 불길이 솟아오른 것이다.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상대방에 붙은 불만 보였어요. 내 몸에선 아지랑이만 보였고 뜨겁기는커녕 오히려 서늘한 느낌이었죠."

둘의 운명은 갈렸다. 반팔 면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던 이광선은 불타는 옷을 모두 벗어던져 목숨을 구했다. 체육복을 입고 있던 동료는 신체의 75%에 화상을 입고 일주일 만에 숨졌다.

이광선은 "녹아 들어가는 옷과 살을 떼어내며 고통스러워하던 동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온몸의 3분의1 가량 화상을 입은 그는 한 달 동안 입원했다. 동료의 어머니가 이광선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 몫까지 살아달라."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소방관 맥가이버' 에게 필요는 발명 의 어머니다. 소방차 진입이 어려운 산불을 잡기 위해 멀티 콘센트처럼 소방호스를 여러개 꽂아 쓰는 장비를 만들었다. 이광선 서울마포소방 서 소방장이 고압 소방용수 분배기 를 들고 미소 짓고 있다

물(水)

그는 "이제 와 인생을 돌이켜보니 '사람을 살리는 데 힘써달라'는 당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광선이 사람 살리는 일에 전념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는 화상당한 이듬해인 1979년 말 전역했다.

해군 특수요원으로서의 5년여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한 것이다. 불에 호되게 당한 그는 사회생활을 물과 함께 시작한다. 군에서 폭발물 전문가이자 심해(深海)잠수요원이었던 그를 민간에서 그냥 두지 않았다.

이광선은 해외 유전 개발에 참여하는 민간 회사에 특채(特採)됐다. 그가 맡은 임무는 유전 채취를 위한 해저 파이프 등을 깊은 바다에서 연결하는 것이었다.

잠수는 스쿠버(scuba) 장비를 이용해 수심 40m까지 내려갈 수 있는 공기잠수, 58m까지 내려가는 표면공급공기잠수, 100m까지 내려갈 수 있는 표면공급혼합기체잠수, 300m까지 내려가는 포화잠수 등으로 구분된다.

일반인들이 숨을 참고 하는 잠수는 대개 5m깊이에서 1분 정도까지 가능하다. 해녀의 경우는 최대 20m까지 잠수해 2~3분 정도 숨을 참을 수 있다고 한다. 이광선은 표면공급공기잠수를 주로 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은 프랑스나 영국 등의 심해잠수팀이 잠수종(�v水鐘)을 이용해 작업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이던 때 그곳의 해외 건설사업에 참여했던 것을 비롯, 노르웨이 유전 개발에도 투입됐다.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리비아·아랍에미리트 등의 해저에서 기름을 분리시키는 해양구조물 설치 작업을 했다. 깜깜한 심해에서 그가 의지할 것은 배와 연결된 케이블뿐이었다.

인도 뭄바이에서 선박 인양 작업을 할 때 또 죽을 위기를 넘겼다. 선체(船體) 인양을 위해선 먼저 폭약을 터뜨려 잘게 부순 뒤 끌어올려야 하는데 폭발물을 설치한 요원들이 멀리 피하기 전에 폭파된 것이다.

수중 폭파를 할 때 잠수요원들이 최소 반경 1㎞ 이상 피한 뒤에 한다. 그런데 500m를 막 벗어날 때쯤 폭발물이 터진 것이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구조물이 충격완화 작용을 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생명

1991년 2월부터는 불과 물을 더불어 살게 됐다. 나이 서른다섯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남의 생명을 구하는 소방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지나가다 벽에 붙어 있는 모집공고문을 봤다.

"자격증 소지자를 우대한다는 글자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물과 불을 다스리는 자격을 갖고 있었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난 지 사흘 만에 충북 단양군에서 충주호 유람선이 불탔다.

엔진 과열이 원인인 이 사고에서 29명이 목숨을 잃고 33명이 다쳤다. 이 참사를 계기로 수난(水難) 구조대 창설이 공론화됐고 1997년 서울 영등포소방서에 119 수난구조대가 생겼다.

총 길이 42㎞에 이르는 한강 서울 구간의 안전사고 대응을 총괄하는 임무였다. 수난 구조대는 기관사, 항해사를 포함해 총 21명으로 꾸려졌다. 이때부터 이광선의 장비 개발도 시작된다.

첫 작품이 인명구조용 공기호흡기다. 전에는 구조대원이 물속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산소통을 짊어지고 기타 장비를 장착하는 데만 5분이 걸렸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5분이라는 시간은 생사가 좌우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광선은 산소통을 메지 않고도 물속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장비를 고안했다. 심해잠수사로서의 경험을 응용한 것이다. 산소통을 배 위에 그대로 두고, 호스를 연결해 대원들이 물속에서 산소 공급을 받도록 한 것이다.

입수(入水)까지의 시간이 1분 이내로 단축됐다. 그는 "이 장비 덕에 목숨 건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발명에 빠져들게 됐다"고 했다. 이광선은 경량 표면공기공급기라 이름 붙인 이 장비를 개발한 공로로 특별 승진한다.

서울 마포소방서 제공 이광선 소방장이 개발한 초고온 절단기. 봉이 녹아 들어 가면서 금속을 녹이거나 자르는 장비다

발명

이듬해 이광선이 내놓은 것은 '스크루 재활용'이다. 한강 수난구조용 보트는 심할 때 하루에도 몇 개씩 스크루가 부서져 애를 먹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로 한강 물이 빠질 때 모터보트 스크루가 강바닥에 닿아 망가지기도 했다.

스크루가 전량 수입되던 터라 하나 고장날 때마다 비용이 20만원 이상 들었다. 모두가 '어쩔 수 없겠거니' 했을 때 이광선은 "고쳐 쓰자"고 제안했다. 그는 부러진 스크루와 성한 것을 금형공장에 맡겨 때우도록 했다.

심해잠수사 시절 큰 배들도 스크루를 때워 보수하던 걸 참고한 것이다. 보트 스크루 소재가 알루미늄이어서 때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비용도 2만원이면 충분했다. 이광선의 제안은 수입 대체 효과를 거뒀다. 그는 특별승급했다.

2005년에는 초고온 산소절단기도 개발했다. 소방관들이 구조를 위해 불에 타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장애물을 제거하는 도구다. 이광선이 이 장비를 개발하기 전에는 소방관들이 산소용접기로 철문을 부수고 쇠기둥을 잘랐다.

하지만 불꽃이 튀어 화재 위험이 있는 등 위험 요소가 많았다. 이에 비해 초고온 산소절단기는 절단봉이 녹아들어가면서 섭씨 5000도의 열을 발생하는 방식으로 뜨거운 불꽃이 나오지 않는다.

구조도 단순하다. 소방용 공기통을 등에 메고 절단봉이 달린 권총모양의 방아쇠를 당기면 된다. 초고온이기 때문에 각종 금속은 물론이고 콘크리트나 돌 같은 구조물로 단박에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을 개발하는 데도 심해잠수사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는 "심해에서 잠수함이 어망에 걸렸을 때 잠수사들이 비슷한 원리의 기구를 들고 나와 쇠로 된 어망을 잘라내는 데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소방의 맥가이버'로 통한다. 1980년대 중반에 방영된 인기외화의 주인공을 빗대 기발한 방식으로 척척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비 개발은 계속 이어졌다.

소방관들이 건물 밖으로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손바닥만한 소형 완강기도 개발했고 작년 내놓은 소화기 구조 개선안은 서울시에 인계됐다. 서울시는 이것을 공매(公賣)해 제품 출시에 따른 수익의 일부를 받을 계획이다.

한 손으로 소화기 통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분사 호스를 들어야 하는 구조 때문에 화재 때 노약자들이 소화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점에 착안했다. 소화기 본체에 손잡이를 부착해 누구나 손쉽게 들고 이동할 수 있게 했다.

호스도 소화기 지지와 진화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보완했다. 지하철역이나 건물의 계단을 노인들도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안전난간'도 특허 출원 중이다. 스프링 원리를 응용해 힘을 들이지 않고도 탄성으로 계단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동료들 대부분은 이광선을 '호기심 많은 발명가'나 '인상 좋은 아저씨' 정도로 생각한다. 말도 없을뿐더러 캐물어도 "허허" 웃어넘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해군특수부대(UDU) 출신에 심해잠수사로 오대양을 누볐던 것과,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 눈부신 활약으로 특별승진한 것 등 그의 과거를 속속들이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이유다.

2006년 이광선은 15년간 몸담았던 구조대를 떠났다. 구조대원은 50세 이하여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그는 현재 화재조사팀에서 화재원인 조사를 담당하고 있다. 장비 개발에 이바지한 '관찰력'은 이곳에서도 빛을 발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화재원인을 발견해 동료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그는 부산 실탄사격장 화재에 대해서도 "잔류 화약에 의한 분진폭발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경찰 수사가 화재 원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때였다.

그는 기관사·항해사·통신사·화재조사관 등 자격증만 10여개 갖고 있다. 소방공무원으로 관련 업무를 하다가 조금 더 파들어가 딴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동료도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