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건한 글씨가 문득 족자에서 솟구쳐 눈에 들어온다. "臨敵先進爲將義務(적을 만나면 먼저 나아가는 것이 장수의 의무다)." 대한의군(義軍) 참모중장의 직책을 맡았던 안중근에게 앞장서서 위기를 헤치는 것은 거의 본능처럼 자연스러웠으리라. 그는 늘 앞장섰다. 나라가 살길을 찾아 헤맸지만, 판단이 서면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래서 서른 갓 넘고 역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안중근 유묵전'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순국 100주년을 기념한다. 현존하는 안 의사의 글씨들과 자료들이 거의 다 모여서, 그의 삶을 살피기 좋은 자리다.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遇失機 追悔何及(동양을 보전하려면, 먼저 정략을 고쳐야 한다. 때를 만났는데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일본에 대한 진지한 충고를 담은 이 글씨는 훨씬 부드럽다. 정략을 바꾸라는 충고의 바탕은 그의 〈동양평화론〉이다.

안중근은 많이 배운 사람은 아니었다. 사서오경과 〈자치통감〉을 통해서 유학(儒學)을 배웠고, 〈만국역사〉와 〈조선역사〉 같은 사서(史書)들을 통해서 역사를 공부했다. 시사 문제들에 대한 안목은 국내외 신문들을 통해서 길렀다. 학문이 깊지 않았던 그가 국제정세에 관한 안목을 갖추어 일본의 간계를 꿰뚫어보고 동양의 진정한 평화를 위한 방략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소설가 복거일씨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안중근 유묵전’을 둘러보고 있다.

전시된 유묵과 자료들을 음미하노라니, 안중근의 인품이 느껴진다. 사람의 능력은 제약되었으므로, 높은 덕성은 둘레에 본의 아닌 폐를 끼친다. 그의 큰 뜻은 그로 하여금 때로 가정에 소홀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안중근은 부인에게 남긴 옥중 유서에서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라고 썼다. 그러나 그의 막냇동생 공근은 "[형 부부 사이는] 나쁘다고 할 수 없으나 화목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바로 아랫동생 정근은 "형은 생계를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부모에게 특별히 효행을 했다고 할 수는 없고, 또 우리들과도 화목한 편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자신의 목표가 마음을 가득 채워서, 둘레의 생각과 눈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큰일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그러했다.

족자 하나 앞에 걸음이 오래 머문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해마다 꽃들은 비슷하지만 해마다 사람들은 다르도다)." 1909년 10월 26일 그는 확실한 죽음을 향해 하얼빈 역두를 걸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꿋꿋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서른한 살에 죽는다는 것이 어찌 아쉽지 않았으랴. 내년에도 꽃은 피겠지만 자신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는 생각에 어릴 적에 배운 시구가 떠올랐을 것이다. 원래 머리 허연 노인의 서글픈 마음을 읊은 유정지(劉廷芝)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에 나온 구절이므로, 그의 젊은 가슴에 어린 소회가 더욱 깊었으리라.

〈만주일일신문〉에 실린 안중근 재판 광경 스케치에 보이는 재판 참여 인물들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국선 변호인들의 변론이다. 가마다 세이지 변호사는 "적용될 법은 한국 법인데, 한국 형법은 섭외적(涉外的) 형벌 법규가 없으므로, 무죄다"라는 요지의 변론을 했다. 미즈노 기치다로 변호사는 "피고의 행동이 애국심에 나온 것이 분명하므로, 징역 3년 이하의 형이 옳다"는 요지의 변론을 했다. 일본의 들끓는 여론 속에서 나온 이런 변론은 일본이 이미 근대적 법 체계를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은 중세적 법 체계를 그대로 지녔다. 그런 차이가 바로 두 나라의 국력의 차이였고 조선의 독립을 위협했다.

안중근은 일제 검찰 신문에서 "조선이 독립을 되찾으면 조선도 부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뤼순 감옥 간수에게 건네 준 '독립(獨立)'이라는 글씨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전해준다. 대한민국 60여 년의 역사는 그의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휴전선 북쪽에선 일본의 통치보다 훨씬 압제적인 통치 아래 북한 주민들이 고생한다. 북한 주민들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때, 그가 한 세기 전에 시작한 싸움이 끝날 것이다.

이제 안중근의 몸은 이역(異域)의 흙이 되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가 묻힌 곳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국권이 회복되면 조국으로 반장(返葬)하라'는 그의 유언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이란 서명에 장문(掌紋)이 찍힌 글씨들만이 남아서, 그의 높은 뜻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