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맞는 거 같아. 결국 여기에 오게 됐네, 여보."

19일 오후 2시30분, 경기도 이천시의 한 작은 마을. 오혜숙(41)씨가 산기슭의 조그만 봉분 앞에 남편 김모(43·자영업)씨와 함께 섰다. "저만 살아난 게 미안해서 그동안 오지 못했어요. 늦게라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오씨는 지난 2007년 5월 17일 초등학교 6학년 아들(13·당시 4학년)이 다니던 서울 원묵초등학교에서 소방훈련을 받느라 사다리차 바스켓에 탔다가 와이어로프가 끊어지면서 바스켓이 뒤집히는 바람에 24m아래 운동장으로 추락했다. 함께 타고 있던 학부모 2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오씨는 양팔이 부러지고 골반이 으스러졌다.

사고 후 입을 굳게 다물고 지낸 오씨는 이날 남편과 나란히 숨진 학부모의 묘에 찾아갔다. "꼭 한 번 오고 싶었어요. 용기를 내 물어물어 찾아왔어요."

오씨는 사고 1주일 전 소방훈련에 참여하라는 가정통신문을 받았다. 훈련받는 날은 학급 어머니회와 녹색 어머니회에서 다 함께 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불참할 생각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침에 안 자던 늦잠을 잤어요. 같이 못 놀러 가고 대신 훈련에 참석했지요."

이 학교 4학년 학생 250명과 교사·학부모 20여명이 운동장에 모여 훈련에 참여했다. 아이들 150명이 4~5명씩 조를 짜서 소방 사다리차 바스켓에 올라탔다. 학부모 차례가 됐다. 맨 앞줄에 서 있던 오씨와 다른 두명이 바스켓에 탔다. 바스켓이 높아질수록 세 사람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씨는 "용기를 내 밑을 보니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여 자리에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바스켓이 멈췄다. 오씨는 "'쿵' 소리가 들리며 바스켓이 좌우로 심하게 요동쳤다"고 했다. 세 사람 입에서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불안한 속삭임이 나왔다. 그때 바스켓을 지탱하는 와이어로프가 '툭' 끊어졌다. 바스켓이 뒤집혔다. 함께 있던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오씨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바스켓에 매달렸지만, 손에서 힘이 빠져 수십초 만에 아래로 떨어졌다. 오씨는 소방차 위에 떨어졌다가 운동장으로 튕겨 나왔다. 주위 사람들이 다급하게 외치던 소리를 오씨는 희미하게 기억했다.

"다른 두 사람은 이미 가망이 없어요. 이분은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으니까 빨리 구급차 불러서 옮겨요!"

그 후 오씨는 6개월은 서울대병원에서, 3개월은 상계동의 한 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다. 우울증이 왔다. 밤마다 절벽 위에 서 있거나 물속에 잠겨 있는 악몽에 시달렸다.

9개월 만에 퇴원한 집은 더 이상 편치 않았다. 오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아파트 7층이 '더 이상 여기서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고 했다. 주위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남들이 '저 사람은 사고당했으니까 도와줘야 해'라는 눈빛으로 보는 것 같았어요. 피하고 싶었어요. 전 정말 그런 관심은 받기 싫었거든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하고 원망도 많이 했어요."

사고를 목격한 원묵초등학교 학생들은 50% 이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끔찍한 사고나 재난을 겪은 뒤 나타나는 정신적 장애)'을 겪었다. 오씨의 남편과 두 자녀도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오씨는 "퇴원해서 집에 오니까 아들이 어딜 가나 내 손을 놓지 않고,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들어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사고 전까지 오씨는 각종 학부모 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일주일에 서너 번씩 학교에 갔다. 사고 후로는 학교에는 대통령 선거 때 투표하느라 딱 한 번 갔다. 그는 "내 가족이 고통받는 것도 힘들었지만, 함께 있던 엄마들 생각이 날 때 너무 괴로웠다"고 했다.

"그분들 집 앞을 지날 때면 '나만 살아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어느 날 학교 갔다 온 아들이 '그 애들이 나보고 너는 엄마가 살아 계셔서 좋겠다고 했어' 하는 거예요. 숨이 턱 막혔어요. 그 아이들이 나를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 학교 앞을 지나다니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어요."

오씨는 작년 이맘때부터 차차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두 자녀의 뒷모습을 보며 '언제까지나 어둡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오씨는 매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그날 사고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마음을 고쳐먹자 집이 다시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동생의 권유로 국선도(國仙道)도 수련했다. 오씨는 "운동에 몰입하면 괴로움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며 "국선도 실력이 늘면 노인정과 복지관을 돌아다니며 공짜로 가르쳐 드리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다"고 했다.

오씨를 지도한 국선도연맹 최동춘 총재는 "처음엔 운동이 끝나도 주위 사람들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던 사람이 요즘은 항상 밝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묘지 앞에서 오씨는 "○○엄마, 저 왔어요"하고 목 메어 말하다 소리 내 펑펑 울었다. 남편 김씨가 오씨를 다독거렸다. 오씨는 "마음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이제 겨우 빠지는 것 같다"고 했다.

"돌아가신 두 분을 생각하면 '엄마가 자식을 위해 희생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동안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을 위해서도 엄마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