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충남 소재 A군청 앞은 아침부터 군수를 면담하기 위한 농민들로 시끌벅적했다. 군청 농업식품과장은 "군에 지원을 요청하러온 작목반장(재배작물 품목별 모임의 대표)이다. 현재 농사는 정부의 지원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작목반장들의 요구는 밤 농사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청 내역은 다양했다. 친환경 비료, 일손, 제초기, 수확그물, 밤 까는 기계, 장기보관용 아이스박스, 홍보비용, ‘밤 축제’ 개최비용 등이었다. 한 작물에 10가지 이상의 지원요청이 달려있었다.

“이미 지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작물 종류도 한두 개가 아닌데…. 우리 군은 재정 자립도가 20%가 안 되는데 요구사항이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올해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책정한 농업보조금은 10조1000억원. 하지만 전체 농민의 62%를 차지하는 경지면적 1ha 미만 영세농들의 순농업소득은 평균 5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10조원이 넘는 정부 보조금이 있는데 "사는 게 힘들다"는 농민들의 하소연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이유는 무얼까.

◆ 농촌의 초고령화와 쌀농사 과잉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에서는 농민 1만5000여 명이 상경해 쌀값 폭락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현재 전체 농업 중 쌀농사 비중은 절반 정도이다. 쌀값 폭락은 국내 농가소득 폭락으로 직결된다. 게다가 쌀을 제외하면 식량 자급률은 평균 5% 수준에 불과하다. 쌀농사 위주의 농업 구조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눈에 잡히는 해결 방법이 많지 않다.

충청남도의 일선 농업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군청 농정(農政) 관계자들은 구조적인 문제로 65세 이상 인구가 이미 30%를 넘어선 농촌의 초고령화를 꼽았다. A군청 농업정책과장은 “젊은 사람들은 규모화, 기계화, 다각화로 그나마 소득이 괜찮다”며 “노인들은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 영세농들인데 새로운 작물을 재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만 60세 이상의 인구가 40%에 육박하는 청양군에서 만난 이장 정모(65)씨 역시 작물 교체에 회의적이었다. “젊은이들은 하우스를 지어 토마토, 멜론 같은 원예작물을 키울 의욕이 있지만 60세만 먹어도 쉽지 않아유. 보조금을 받는다 해도 목돈 투자가 필요헌디 돈도 없쥬. 늙은이들이 새 기술 익히기도 어렵쥬. 엄두도 못내유.”

밀려드는 수입쌀에 대응해 오리농법, 우렁이농법, 쌀겨농법 등 친환경 고품종 재배가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친환경 쌀의 수매가는 40kg 1포대당 6만원 가량으로 일반 쌀에 비해 1만원 이상 높다. 충남 C군청 농업식품과장은 “품질 향상과 생산량 조절차원에서 장기적으로는 친환경 농법으로 가야 한다”면서도 “나이 드신 분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경기가 안 좋기 때문에 비싼 가격으로 인해 사실은 고소득이 아니라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근 농업계 일각에서는 일정기간 휴경을 하거나 벼대신 다른 작물을 심는 ‘쌀 생산조정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매년 남는 쌀은 16만톤 정도인데 쌀 가공식품이 활성화되는 추세여서 2012년부터는 수급이 맞을 것”이라면서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정부와 농협 향해 쏟아지는 원망들

충남 소재 한 군청에서 20년 이상 농업정책을 담당하고 최근 퇴임한 전직 공무원 K씨(60)는 농업지원금에 대해 ‘복지병’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향토사업, 녹색체험마을, 전통마을 등 여러 사업을 한 마을에서 독식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이장이 똑똑하면 10억원도 따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부처간 지원금 중복 문제에 대해서도 “지원 창구를 조속히 일원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농림수산식품부의 관계자는 “요새 그런 일이 있다면 주민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부인하며 “현재 288개인 보조금 사업을 2012년까지 100개 사업으로 단순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년 화학비료 보조금 폐지를 비롯해 보호 일변도였던 보조금 체계를 경쟁력 향상 위주로 전환할 것”이라며 “고령 영세농들에 대한 문제는 복지정책으로 해결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지원 요청을 위해 B군청을 찾은 작목반장 김모(67)씨는 “정부는 그나마 양반”이라면서 농협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지난 해 불황 속에서도 자회사 임원들의 평균 연봉은 오히려 인상돼 1억7200만원에 달했다. 골프장과 콘도 회원권 구입에는 857억원을 지출해 물의를 빚었다. 이씨는 “농민치고 농협 좋아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라며 “농협에서 정치할 시간에 소비지와의 직거래 유통이나 정립시켰더라면 농산물도 제값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군의 농민단체 간부 이모(65)씨를 비롯한 농민들은 “정부나 농협에서 이제껏 큰돈 들여 펼친 정책으로 그 마을이 부자가 됐다는 소리를 못 들어봤다”고 평가 절하했다. “도시에서는 ‘농민들이 돈벼락을 맞았는데 왜 이렇게 못 산다고 징징대냐’고 흉봐유. 근데 그건  영세농들허곤 상관이 없슈. 우린 그런 거 필요 없시유. 그저 비료나 기계지원 같은 거나 바랄 뿐이유.”